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고등훈련기 T-50A. [사진 제공 · 한국항공우주산업]
“모든 업체에 기회 열려 있다”
T-X 사업에서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손잡고 T-50A를 제안했다 고배를 마신 록히드마틴이 미 공군의 RFI 발표 사흘 뒤 사업 참가 의사를 밝혔다. 록히드마틴 대변인은 “(군용기) 개발과 생산, 업그레이드, 그리고 반응 속도를 더욱 높이는 디지털 엔지니어링과 개방형 아키텍처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 미 공군의 사업 요구사항을 면밀히 검토해 최상의 솔루션을 제공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록히드마틴이 어떤 기종으로 도전할지 밝히진 않았지만, 미 공군의 사업 타임라인을 고려했을 때 선택지는 T-50A가 유일하다. 2018년 9월 T-50A는 보잉-사브 컨소시엄이 제안한 모델에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한 바 있다. 당시 경쟁 기종 중 실적 기체를 갖춘 것은 T-50A가 유일했다. 성능·제원도 경쟁기를 압도했기에 수주가 유력하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T-50A는 보잉-사브 컨소시엄이 내세운 파격적인 가격에 무너졌다.당초 미 공군이 신형 훈련기 351대 도입에 책정한 예산은 197억 달러(약 23조2755억 원)였다. 록히드마틴-KAI 컨소시엄은 이보다 약간 낮은 160억 달러(약 18조9000억 원)를 제안했다. 보잉-사브 컨소시엄도 비슷한 가격을 써 낼 것으로 예상됐으나 실제는 달랐다. 92억 달러(약 10조8700억 원)에 완성 기체 475대, 지상훈련체계 120대를 공급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서를 낸 것이다. 정치적 판단도 보잉-사브 컨소시엄 승리에 한몫했다. 록히드마틴은 미 공군의 신형 전투기 사업에서 잇달아 승리해 F-22, F-35 주계약자로 향후 수십 대 일감을 확보했다. 반면 보잉은 F-15E 성능 개량과 F/A-18E/F 추가 조달 외에는 이렇다 할 신형 전투기 수주 성과가 없었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보잉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줘야 록히드마틴의 독과점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러한 조건이 맞물려 T-X 사업은 예상을 깨고 보잉 측이 수주했다.
미 공군 차세대 고등훈련기로 선정된 보잉-사브 컨소시엄의 T-X는 T-7A 레드호크(Red Hawk)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고 본격적인 전력화에 나섰다. 보잉-사브 컨소시엄은 2022년까지 양산 모델 개발을 완료하고 2023년부터 생산에 돌입, 2024년 초기작전능력(IOC), 2034년 완전작전능력(FOC)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미 공군의 이 같은 행보에 노후 훈련기를 대체하려는 주요 우방국들의 T-7A 구입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초 T-7A는 4차 산업혁명의 상징처럼 인식됐다. 통상 군용기 개발은 10년 이상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보잉-사브 컨소시엄은 T-7A 유체역학 평가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고 주요 부품을 3D(3차원) 프린터로 생산하는 등 혁신적인 공정으로 개발 기간을 5년 이내로 단축하겠다고 공언했다.
보잉-사브 컨소시엄의 고등훈련기 T-7A. [사진 제공 · 보잉]
치명적 결함 ‘윙 록’
신기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독이 된 것일까. T-7A 개발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해 납품에 빨간불이 켜졌다. T-7A 개발 지연을 일으킨 가장 큰 문제는 비행 안정성이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반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해 실제 비행에서 문제가 터지고 만 것이다. 윙 록(wing rock)도 심각한 문제였다. 윙 록은 높은 받음각(angle of attack), 즉 항공기가 급기동하는 상황에서 날개를 따라 흐르는 공기 진동이 항공기 전체에 퍼져 진동하는 현상이다. 윙 록이 발생하면 항공기는 실속(失速)에 빠져 양력과 조종성을 잃고 추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항공기로서는 그야말로 치명적 결함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날개나 동체 형상을 전면 재설계하거나, 기체 소재 및 골격 변경으로 구조강성을 높여야 한다. 당연히 비용이 크게 늘고 설계 변경, 검증에 시간이 소요돼 전력화 일정도 늦춰질 수밖에 없다.미 공군이 기존에 운용하던 고등훈련기 T-38은 이미 심각하게 노후한 상황. T-7A 전력화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미 공군은 당장 임박한 전력 공백을 메우고자 소량의 훈련기를 임대하는 RFX(조종사 양성 혁신) 사업을 추진하고 신규 훈련기 사업 소요를 제기한 것이다. T-7A 사업 실패에 대비한 보험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8년 수주전에서 석패한 T-50A가 다시 강력한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다. 설계는 비교적 오래됐으나 확실히 검증된 성능과 신뢰성을 갖추고 있어서다. 게다가 세계 각국에 이미 160여 대가 수출돼 훈련기는 물론, 경전투기로도 운용될 만큼 고등훈련기 중 최고 성능을 자랑한다. 특히 미 공군은 이번에 도입할 고등전술훈련기를 훈련 시 가상 적기나 저강도 분쟁에서 공격기로 활용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적어도 미군 현용 주력 전투기와 모의 공중전이 가능할 정도의 기동성과 무장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 비행 안전성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T-7A에 비하면 T-50A가 월등히 앞선다.
미 공군은 ATT 사업 참가 요구 조건으로 △마하 0.9 이상 속도 △대화면 디스플레이 조종석 △무장 및 다양한 미래 임무 장비 탑재가 가능한 하드포인트(무장 장착대) △90분 이상 체공 능력 및 최소 30분간 전술 고기동 능력 △4만5000피트(1만3716m) 이상 실용 상승 고도 △7.5G 이상 중력 가속도 내구성 △전술 전투기로 실전 투입할 수 있는 제반 능력 등을 내걸었다. 이미 개발됐거나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고등훈련기 가운데 이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기종은 T-50A뿐이다. KAI와 록히드마틴이 이번 ATT 사업에서 다시 의기투합해 기존 T-50A를 조금만 손본다면 지난 패배를 설욕할 수 있을 것이다. 미 공군에 대량 납품이 성사될 경우 미국 동맹국으로부터 러브콜이 쏟아질 수도 있다.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록히드마틴 F-35 생산 공장. [동아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