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 [동아DB]
신 창업주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대기업 창업주 1세대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롯데제과로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그는 2017년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완공 때까지 그룹을 진두지휘하는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금탑산업훈장 등을 수훈하며 정재계에서 모두 인정받았다.
2017년 4월 개관한 롯데월드타워. [동아DB]
아르바이트생 고용한 아르바이트생
신 창업주는 ‘대한해협의 거인’으로도 불렸다. 한일 양국에서 자수성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져서다. 그는 1941년 부관연락선(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사이를 운항하는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지각이나 결근 한 번 없이 우유 배달을 하는 성실한 모습을 대견하게 여긴 우유 대리점 사장이 그에게 두 구역의 배달을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발생했다. 늘어나는 물량 때문에 배달 시간을 지키기가 어렵게 된 것. 신 창업주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이를 해결한다. 아르바이트생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사고의 틀을 깨는 방식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신 창업주의 이 같은 모습을 눈여겨봤고, 이후 그에게 사업자금을 대줬다.힘들게 일군 공장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두 번이나 소실됐다. 사업을 포기할 법도 하건만 신 창업주는 포기하지 않고, 끝내 1948년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껌으로 사업을 시작한 롯데는 이후 초콜릿, 캔디 등 상품군을 넓혀 20여 년 만에 굴지의 종합제과업체로 우뚝 섰다.
타국에서 자수성가했지만 한 번도 고국을 잊지 않았다. 마침 1965년 한일수교가 이뤄지면서 신 창업주는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00달러 수준에 그치던 한국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1967년 롯데제과 설립은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그는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확장해갔다.
“거기 가봤나.”
한 달씩 한국과 일본을 오간 신 창업주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그는 평소 롯데 임직원들에게 “고객으로부터, 동료로부터, 파트너사로부터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기를 부탁한다”고 주문했다. 고인 묘역에 있는 와석(臥石) 금석문에도 ‘여기 울주 청년의 꿈 대한해협의 거인 신격호 울림이 남아 있다’라는 문장에 뒤이어 ‘거기 가봤나?’가 덧붙여 새겨져 있다.
롯데가 단기간에 재계 5위 그룹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도 신 창업주가 평소 주장한 ‘현장 경영’이라는 경영철학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 오면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롯데호텔에 불쑥 등장했다. 자주 매장을 둘러보며 고객서비스, 위생 상태, 안전 점검 등을 직접 체크했다. 롯데 자이언츠 초대 사령탑을 맡은 박영길 전 감독이 겪은 일화 역시 유명하다. 박 전 감독은 “어느 날 불 꺼진 호텔 복도에서 창업주가 무언가를 하고 계시기에 봤더니, 바닥에 떨어진 하얀 실오라기를 직접 줍고 계셨다”고 회고했다.
현장 경영·책임 경영·내실 경영
고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 회고록.
신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은 지금도 살아남아 재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롯데그룹이 신 창업주의 생일인 11월 3일 고인의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롯데월드타워 1층에 그를 기리는 흉상을 설치한 이유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은 요즘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무너진 경제를 어떻게 세울지를 두고 온 국민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일 양국에서 경제번영에 일조한 신 창업주의 철학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이유다.
최진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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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최진렬 기자입니다. 산업계 이슈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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