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공짜 야근’에 시달리는 사무·연구직 직원이 적잖다. ‘흉기차’라는 조롱을 만회하려면 회사가 적절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이건우 현대자동차그룹 ‘인재존중’ 사무·연구직 노동조합 위원장)
MZ세대(1980~2004년생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의 노조 설립 바람이 뜨겁다. LG전자(올해 3월), 현대자동차그룹, 금호타이어(이상 4월) 사무직·연구직 직원들이 잇달아 노조를 결성했다. 2018년 네이버 노조 설립 후 잠잠하던 MZ세대 노조 붐이 ‘공정 담론’ 확산 속에서 다시 불고 있다. 기성세대는 “투쟁 일변도인 양대 노총 중심의 노조운동에 경종을 울렸다” “선배 노조의 투쟁 성과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며 환영 혹은 경계한다. ‘주간동아’가 “기성세대의 낡은 프레임에 갇히지 않겠다”는 MZ세대 노조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임단협 과정 불투명, 소문만 무성”
1월 SK하이닉스가 연봉의 2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지급하기로 하자 직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해 매출(31조 9004억 원, 전년 대비 18% 증가) 및 영업이익(5조126억 원, 전년 대비 84% 증가) 증가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불만이었다. 경쟁사 삼성전자가 성과급 액수를 연봉 대비 47%로 잡은 것도 직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SK하이닉스의 낮은 연차 직원을 중심으로 ‘퇴직 러시’가 벌어지자 다른 대기업 직원들도 “남의 일이 아니다”라며 술렁였다.
이건우(28) 현대자동차그룹 ‘인재존중’ 사무·연구직 노동조합 위원장이 밝힌 노조 설립 계기도 비슷했다. 이 위원장은 “오랫동안 곪아온 문제가 터졌다. 결정적 계기는 올해 정의선 회장의 ‘타운홀 미팅’(3월 16일 그룹 임직원을 대상으로 개최한 온라인 간담회)이었다. 상당수 직원이 성과급 인상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지만, 정 회장은 ‘각 계열사 사장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취지로 답했다”며 “그룹 총수가 사장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냐는 아쉬움이 컸다. 이때를 기점으로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서 사무·연구직 노조 설립 목소리가 커졌다”고 설명했다.
성과급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만 새 노조를 결성한 것은 아니다. 4월 출범 당시 현대자동차그룹 사무·연구직 노동조합이 조합원 2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이 사측에 가장 바라는 것은 업무 시스템 등 제도 개선(19.6%)이었다(그래프 참조). 성과급 기준 투명화(14.4%), 보상 기준 확립(7.2%), 조직문화 개선(6.0%)이 뒤를 이었다. 이 위원장은 “사무·연구직은 그동안 처우 개선 및 복지 사각지대에 있었다. 직원들의 불만을 단순히 성과급을 올려달라는 요구로만 치부해선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조합원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개발 일정을 무리하게 수립한다’ ‘근로계약서를 받지 못했다’ ‘일을 열심히 하면 더 시키고 잘못이 생기면 책임만 묻는다’ 등 사내 업무 시스템이나 조직문화에 대한 문제점이 많았다. 회사의 원가 절감 방침으로 연구개발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이 제대로 투입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인터넷상에 현대기아차를 ‘흉기차’라고 비꼬는 말이 있다. 이런 비난이 나오지 않으려면 직원들이 업무에 집중해 품질을 향상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무분규가 자랑인가”
4월 24일 이건우 위원장(오른쪽 맨 앞) 등 현대자동차그룹 ‘인재존중’ 사무 · 연구직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노무사들과 노조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대상노무법인]
“현재 생산직 노조는 한국노총 소속으로 사측에 우호적인 편이다. 투쟁이라고 할 만한 활동이 없었다. 현재 노사는 30년 이상 무(無)분규를 내세우는데, 노조에게 무분규가 마냥 칭찬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사측이 사원 복지를 알아서 잘 챙겨주는 것도 아니다. 노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적잖았다.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것도 MZ세대의 특징이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에 직원으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MZ세대 노조 설립을 돕는 김경락 대상노무법인 노무사도 “MZ세대 노조는 기존 노조와 설립, 운영 등 모든 문법이 다르다”고 짚었다. 그는 “과거 노조 조직은 이른바 상급단체가 주도했다. 그 과정도 뜻 맞는 직원들이 모여 한잔하며 ‘으쌰 으쌰’ 하는 식이었다. 반면 최근 노조는 줌(Zoom: 화상회의 서비스) 같은 플랫폼을 통해 ‘디지텍트’ 방식으로 활동한다”며 “(MZ세대 노조엔) ‘필요한 때만 뭉치고 각자 일한다’ ‘어디 가서 함부로 마이크 잡고 노조활동 하는 것 티내지 말자’ ‘사측과 스마트하게 대화하자’는 암묵적 합의가 있는 듯하다. 노사 합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므로 불필요하게 ‘강성’ 이미지를 표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MZ세대 노조는 자신들의 활동을 기존 노조에 대한 ‘공격’으로 풀이하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 노조가 선배 노조와 그 활동을 함부로 평가할 입장은 아니다. 기존 노조(민주노총 산하)가 (새 노조 결성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우호적이었다”(이건우 위원장), “기존 노조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로 처지가 다르므로 다양한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유준환 위원장)라는 것이다. 김 노무사도 “일부 언론 보도와 달리 MZ세대 노조가 선배 노조를 비난하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젊은 사무직이 기존 노조에 들어가고 싶어도 세대·문화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 직군 간 노동 형태도 크게 다르므로 각자 사측과 교섭하는 것이 합리적 대안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노동 전문가 예측 틀렸다”
새로운 노조가 풀어야 할 과제도 있다. 당장 노조를 결성했지만 사측과 협상 테이블에 앉을 교섭권이 없다. 4월 30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서울지노위)는 LG전자 사무직 노동조합의 교섭단위 분리 신청을 기각했다. 새로운 교섭단위로 인정할 만큼 기존 노조 소속 근로자와 근로 조건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2011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으로 각 사업장 단위로 복수 노조 설립이 허용됐다. 다만 단체교섭권을 행사하는 노조 창구는 단일화해야 한다. 노조 간 갈등과 사용자의 교섭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기존 노조에 속한 근로자와 근로 조건·고용 형태·교섭 관행이 현격히 다를 경우 노동위원회에 ‘교섭단위 분리’를 신청할 수 있다.전문가들은 MZ세대의 사무직 노조 결성이 불가피한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지노위의 교섭단위 분리 신청 기각을 두고 한 노동 전문가는 “교섭 창구 단일화라는 기존 원칙에 따라 판정했다고 본다. 다만 4차 산업혁명에 따라 노동 현장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사무직 노조 결성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앞으론 이들의 목소리를 공적 시스템으로 포섭할 전향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영우 한국고용노동교육원 교수는 “이제까지 노동 전문가들은 ‘사무직 노조 결성은 어렵다’ ‘MZ세대는 노조활동에 무관심하다’고 봤지만 결과적으로 틀렸다. 젊은 세대는 노조를 투쟁 수단이 아닌 자신의 요구 조건을 사측에 전달하는 통로 중 하나로 본다. 노동운동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만하다”며 “비교적 높은 임금과 좋은 처우를 받는 대기업 정규직도 분명 고충이 있다. MZ세대 노조의 등장은 불합리·불공정한 기존 사내문화와 노사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봐야 한다”고 짚었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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