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계 원로이자 시즌 내 4할 타율 유지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백인천 전 감독. [동아DB]
한국 프로야구 38년 역사상 유일하게 4할 타율을 넘긴 백인천(77)은 2015년 펴낸 자서전 ‘노력자애(努力自愛)’에 이렇게 썼습니다. 백인천은 1982년 MBC 청룡(현 LG 트윈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며 72경기에 나와 250타수 103안타로 타율 0.412를 기록했습니다.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 파이터스) 시절 한 승려로부터 ‘노력자애’라고 쓴 휘호를 선물 받고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이 말에는 스스로 노력하는 일을 사랑해야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백인천은 세월이 흘러서는 이렇게 4할 타율을 기록하려고 ‘목숨 걸고’ 노력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정작 1982년 당시에는 4할 타율이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한국 야구사에 밝은 것으로 유명한 김은식 작가는 2010년 ‘오히려 시즌 막판 백인천의 소망은 4할 유지보다 3관왕, 즉 타격(타율), 홈런, 타점 타이틀 석권 쪽에 있었다’며 ‘(4할 타율을 유지하려면 타석을 줄이는 게 유리하지만) 홈런과 타점을 늘리기 위해 더 많은 타석 기회를 필요로 했다’고 썼습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당시 40세) 백인천은 이미 다이헤이요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뛰던 1975년 일본 프로야구 타격왕(타율 0.319)을 차지한 선수였습니다. 반면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말 그대로 첫걸음마를 뗀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하는 선수라면 타격 3관왕 정도는 차지해야 만족해했을 법도 합니다.
배앓이 때문에 실패한 4할
배앓이로 선수 시절 대기록 달성에 실패한 이종범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1994년 해태(현 KIA) 타이거즈 이종범(50·현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은 팀이 104번째 경기를 치른 8월 21일까지 102경기에 나와 405타수 162안타로 정확하게 타율 0.400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기가 끝난 뒤 생고기와 육회를 먹고 배앓이에 시달리는 바람에 이후 나흘 동안 13타수 1안타(타율 0.077)에 그쳤고, 결국 다시 4할 위로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이 여파로 본인은 물론 아들인 이정후(22·키움 히어로즈)도 생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종범은 “설사가 심해 당시 경기에 나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다. 그런데 그때는 선수가 코치나 감독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며 “4할 타율뿐 아니라 200안타와 100도루도 목표였다. 그래서 경기에 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그해 기록은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였으니까 생고기만 아니었다면 정말 200안타, 100도루까지 이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2012년 한화 이글스 김태균(38)도 팀이 89번째 경기를 치른 8월 3일까지 82경기에 나와 275타수 110안타로 타율 0.400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44경기에서 141타수 41안타(타율 0.291)에 그치면서 시즌 전체 타율도 0.363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다음으로 오래 4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가 백인천입니다. 경기 수가 적다고 백인천 기록을 마냥 깎아내릴 이유가 없는 셈입니다. 1982년 백인천을 제외하면 5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가운데도 4할 타율 이상으로 시즌을 마친 선수는 없습니다. 백인천은 그해 298타석에 들어섰습니다.
테임즈는 팀이 105경기를 치르는 동안 4할을 쳤다
2016년까지 NC 다이노스에서 뛴 에릭 테임즈.
예컨대 김태균은 2014년과 2016년 각각 타율 0.365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4할 타율에 도전하던 2012년(0.363)보다 높은 기록이었지만 이때는 시즌 도중 타율이 4할 이상으로 오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었지만 실제로 4할 이상을 유지한 기간은 2016년이 2012년보다 더 길었습니다. 김태균은 2016년 5월 25일부터 그해 마지막 경기를 치른 10월 8일까지 팀이 치른 102경기에 모두 나와 377타수 151안타로 타율 0.401을 기록했습니다. 1994년 이종범이 마지막으로 4할을 기록했을 때와 같은 출전 경기 수입니다.
이렇게 뒤에서부터 따지면 NC 다이노스에서 뛰선 에릭 테임즈(34·현 워싱턴 내셔널스)가 김태균보다 더 오래 4할 타율을 유지했습니다. 테임즈는 2015년 5월 20일부터 그해 시즌이 끝날 때까지 103경기에 나와 344타수 138안타로 타율 0.401을 기록했습니다. 이 기간 NC는 105경기를 치렀습니다. 다만 테임즈는 이해 시즌 첫 39경기에서 128타수 42안타 타율 0.328로 부진(?)했기 때문에 시즌 전체 타율은 0.381이 전부였습니다.
테임즈만이 아닙니다. 시즌 초반 타자가 부진한 건 야구에서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지난번 ‘베이스볼 비키니’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기온이 오르면 타격 기록도 함께 올라갑니다. 그때는 OPS(출루율+장타력)가 그렇다고 설명했는데, 타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공식 기록원은 기록지에 매 경기 시작 시간의 기온, 습도, 날씨, 풍향, 풍속 등을 적습니다. 이 기록을 기준으로 2009~2018년 기온별 타율을 살펴보면 △9도 이하 0.260 △10∼19도 0.273 △20∼29도 0.279 △30도 이상 0.283으로 기온이 오를수록 타율도 오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날씨 4할 타자 나올까
4할 기록을 꽤 오래 유지했던 한화 이글스 김태균.
게다가 올해는 더블헤더(두 팀이 같은 날 연속으로 두 경기를 치르는 것)도 있습니다. 이 역시 투수보다 타자에게 유리합니다. 같은 날 타석에 많이 들어설수록 타율도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루에 두 경기를 치른다는 건 ‘에이스급’ 불펜 투수를 연달아 상대할 일이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할 타율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라면 이 역시 분명 타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 KBO는 선수단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 경기 수를 줄일 수 있다는 방침입니다. 경기 수가 줄어들면 4할 타율을 기록할 확률도 올라가는 게 당연한 일. KBO에서 공인구 반발력을 낮추면서 각 팀은 ‘한 방’보다 정교한 타격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미국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는 1996년 펴낸 책 ‘풀하우스’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건 시간이 지날수록 시스템이 안정화되면서 최고 타율 선수와 최저 타율 선수 사이 차이가 줄어들어 튀는 선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4할 타자가 일종의 돌연변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따뜻한 5월이 돼서야 막을 올리는 올해 프로야구 역시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돌연변이 시즌이 4할 타자라는 돌연변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