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 스틸 컷. [사진 제공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 후에는 역대 최고 조커라는 소리를 들었다(물론 이는 재러드 레토를 제외한 다른 배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리하여 ‘조커’는 배트맨의 숙적이자 미국 코믹스 사상 가장 유명한 빌런의 영화를 넘어, 위대한 캐릭터 영화이자 예술영화가 됐다. 마블이 결코 꿈꾸지 못할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이 된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조커라는 캐릭터는 만화 속 악당에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대한 현대 사회의 대답으로 거듭났다.
‘조커’는 위험한 영화인가
‘조커’는 위험한 영화다. 어떤 사람들, 특히 미국의 평론가들이 그 딱지를 붙였다. 악인의 탄생을 다루고 그것에 초점을 맞춘 작품은 ‘조커’ 외에도 많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참고했다고 밝힌 ‘택시 드라이버’를 비롯해, 사회 부적응자가 ‘반골’을 넘어 악의 세계로 넘어가는 이야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창작자에게 매력적인 모티프가 되곤 했다. 선의 그늘에 가린 악을 해부함으로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커’에는 다른 영화들과 다른 잣대가 적용된다. 다른 영화 주인공들보다 ‘조커’의 주인공이 가진 지명도와 영향력 때문이다. 수십 년 전통의 캐릭터이자,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보고 자랐을 조커에 현실적 이야기를 부여하고 당위성을 얹음으로써 발생할 수도 있는 악영향을 고려한 것이다.
창작물이 현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냐는 오래된 논쟁이다. 1980년대에는 보수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헤비메탈이 악마의 음악이니 추방해야 한다는 운동이 있었다. 지금도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술과 담배가 거론되는 음악은 19세 미만 청취 불가 딱지가 붙는다.
이 주장이 맞는지 여부는 별도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이와 관련해 보수적인 입장을 펼치고 제도화까지 하는 쪽은 예술계 인사들이 아니다. 한국 행정부로 치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닌 여성가족부가 ‘유해론’을 펼친다. 국가를 막론하고 예술계는 ‘창작은 창작일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헌데, ‘조커’의 위험성을 주장한 사람은 앞서 말했듯이 미국 평론가였다. 미국 주간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아서 플렉(빌런이 되기 전 조커)과 같은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거의 매일 일으키는 폭력들과 분리해 보기에는 이 영화가 너무나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평했으며,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협회의 영화 관계자들은 ‘조커’가 명작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불쾌하고 기분 나쁘다” “나라면 이런 영화를 제작하지 않을 것” 등의 의견을 덧붙였다. 평범한 한국 대중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청소년 범죄가 일어나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관습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고작해야 게임이나 만화 아닌가. 어른들에게는 늘 ‘공공의 적’이던. 따라서 영화 한 편에 전례 없던 우려의 시선이 그것도 영화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갸웃할 것이다.
‘다크 나이트’와 ‘시계태엽 오렌지’의 사례
영화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히스 레저 분·왼쪽),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알렉스 드 라지(맬컴 맥다월 분). [사진 제공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IMdB]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71년 작품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 드 라지(맬컴 맥다월 분)는 히피문화의 종말 이후 도래한 무정부주의의 상징이 됐고, 영화 속 그의 패션과 행동은 1970년대 중후반 영미권을 강타한 펑크 운동의 직접적인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GettyImages, 위키피디아]
하지만 펑크족이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다. 알렉스를 추종했을지언정 그의 악행을 모방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자신이 빠져든 대중문화에 감화된 나머지 모방을 넘어 청출어람(?)을 이룬 사례가 있다. 1990년대 북유럽 블랙메탈이다.
‘예능’을 ‘다큐’로 받은 북유럽 블랙메탈
메이헴의 자살한 전 보컬 데드의 시체 사진을 쓴 ‘Dawn of the Black Hearts’ 앨범 재킷.
영미권 사타니즘은 기독교적 질서에 대한 반감에서 발생한 반기득권적 운동에 가까웠지만, 오딘과 토르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 신화권에서는 이교와 악마에 대한 진지한 숭배로 발전했다. 1990년대 초반 북유럽의 블랙메탈 키드들은 얼굴에 ‘콥스 페인팅’(시체처럼 보이는 화장)을 하고 온몸에 가죽과 징을 두른 채 오래된 교회에 불을 지르고 이를 거리낌 없이 앨범 커버로 사용했다.
공연 때마다 칼로 손목을 그은 후 피를 관객들에게 흩뿌렸다. 영미권 밴드들이 무대에서 가짜 피를 소품으로 사용한 걸 오해한 결과였다. 밴드 메이헴은 전 보컬이던 데드가 자살하자 그의 시체를 사진으로 찍어 앨범 커버로 썼다. 이 밴드의 리더이자 노르웨이 블랙메탈을 이끌었던 유로니무스는 한때 그의 동료이자 추종자였던 카운트 그리쉬나크에게 잔혹하게 살해됐다. 그에게 블랙메탈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살인이 난무하는 마약 카르텔에서조차 복수를 위해 총을 꺼낼 때는 이해관계가 깔려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에게는 이익과 명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를 접한 미국의 한 메탈 밴드는 “우리는 공연이 끝나면 그저 술이나 마시고 대마초나 피는 사람들이었는데…”라며 어이없어 하기도 했다.
‘조커’는 ‘다크 나이트’와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사회 낙오자들을 악으로 이끄는 작품이 될까. 그저 창작의 영역으로 활용된 영미권 밴드의 사타니즘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또 하나의 초기 북유럽 블랙메탈 밴드들을 낳을까. 답하기 힘들다.
허나 분명한 건,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 예술은 죄가 없다. 메이헴, 버줌 등 극단까지 간 이들을 제외하고도 북유럽 블랙메탈이 음악의 표현법과 미학을 확장했던 것처럼. 참고로, 북유럽에서 블랙메탈은 여전히 인기 장르다.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이 스스로 블랙메탈 팬이라고 밝혔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