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서울 강남 한 한정식집에서 회동을 가진 서훈 국가정보원장, 양정철 민주연구원장, 김현경 MBC 기자(왼쪽부터). [동아DB· 더팩트, 뉴시스, 뉴스1]
국정원은 그 전에도 말이 없었다. 전 직원의 말이다. “경조사에 가면 현직 후배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극도로 입조심을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보안 단속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면 모든 것이 기록되니 후배들이 전화 받는 것을 더 힘들어한다. 그들은 죽음도 목도했다.”
법률가들의 자살 불러온 과거사 조사
이 죽음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후반기에 있었던 두 법률가의 자살이다. 변호사로서 국정원 법률보좌관실에서 근무하던 정지호 씨가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한 데 이어, 역시 법률보좌관실에 파견돼 근무하던 변창훈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투신자살한 것이다. 이들은 대선과 여론조작 같은 국내 정치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우파 정권 시절 국정원은 좌파 세력을 ‘용공’으로 보고 탄압했다. 하지만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칼’을 맞았다. 김대중 정부는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했고, 두 번째인 노무현 정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정부를 본떠 법으로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든 뒤 우파 정권 시절 국정원이 자행한 각종 의혹 사건을 조사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국정원 본연의 임무와 조직에 대해서는 손대지 않았다.
국가 정보의 세계에서 국정원은 주목받는 조직이었다. 경찰과 해경,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국군기무사령부), 정보사령부 등 모든 정보수사기관을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입장에서 판단해 대통령 입맛에 맞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좌파척결이라는 사상 투쟁도 하지만, 대통령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직언하니 대통령들은 좌우 불문하고 국정원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 국정원이 가진 무기 가운데 하나는 공무원에 대한 보안감사권이었다. 이 권한은 법적으로는 김영삼 정부 시절 폐지됐으나, 이명박 정부 시절까지 국정원은 대통령 관점에서 정부 부처를 움직일 수 있었다. 국정원은 영수증 없이 쓰는 돈(정보비)과 용처를 밝히지 않고 쓰는 돈(특수활동비)을 갖고 있었다. 보안감사권이 공무원에 대한 채찍 역할을 했다면, 정보비와 특수활동비는 당근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국정원은 대통령의 의지를 집행하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곤 했다.
사실 북한 정권의 핵심부로 통하는 길을 가장 잘 열 수 있는 기관은 국정원이다.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과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북한과 접촉한다. 국정원이 확보한 통로는 북한과 대화하길 원하는 좌파 정권에게는 매력적인 자산이다. 국정원의 또 다른 전 직원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정권과 체제, 그리고 인류 보편적 가치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통령 처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권 옹위다. 과거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는 대통령 직속 기관답게 정권 옹위에 주력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론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국정원은 미국 중앙정보부(CIA)처럼 체제 보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중추 세력은 북한이 핵개발을 해도 북한 주민의 굶주림과 고통은 덜어줘야 한다며 인도적 지원을 주장하고 있다. 인도적 지원을 위한 통로는 국정원이 잘 개척하기 때문에 국정원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필요한 조직이다. 체제 보위를 위해 좌파를 척결했던 조직이 좌파 정부를 위해 헌신하게 됐으니, 국정원 직원들은 마음을 감출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도 먹여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는 것이다.”
정보 통합과 반대로 가는 국정원 개혁
정치로부터 독립하고자 개혁 대상이 된 국가정보원. 그러나 정보는 국외와 국내로 나눌 수 없다. [사진 제공 · 국회사진기자단]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출신들의 약진
국가정보원에서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앞서 직원들이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제공 · 국회사진기자단]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 직후 국정원이 주도한 화교 간첩 사건이 무죄 판결을 받자 남 원장을 해임해버렸다. 후임 원장들도 국정 조정을 회피했다. 박근혜 정부는 명분을 따라가다 정보의 실패를 맞은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북한과 국외 정보는 해외정보원, 국내 정보는 경찰로 이원화하려는 문재인 정부도 직면할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과 접촉을 피하고 있다.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후로는 미국과 접촉도 마다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셈법을 바꿔야 한다”고 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5월 단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또 다른 전직 국정원 간부는 “김정은이 미국은 셈법을 바꿔야 한다고 얘기한 것은 미국이 내놓은 방안을 봤다는 뜻이다. 미국의 방안을 봤다면 우리의 방안도 봤을 것이다. 김정은은 미국을 거론하면서 한국의 방안도 바꾸라고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외교관은 “우파들은 문재인 정부가 한미동맹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문 정부는 동맹 파괴가 아니라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고 한국군 대장이 연합사령관을 맡게 하는 식으로 한미동맹을 재조정하려 한다. 미국이 우위에 있는 한미관계를 가급적 대등하게, 한일관계는 더욱 수평으로 맞추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문재인 정부는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이 문제를 논의하는 모양새를 갖추길 바랐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6월 말에 보자고 미뤘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후 800만 달러에 상당하는 대북 인도적 지원을 발표하고 이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해온 북유럽 국가를 순방하려 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거절로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외교는 외교부가 독점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정원이 제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전직 국정원 간부는 “문재인 정부의 대미·대북관계는 국정원 산하 싱크탱크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자들의 성향은 제각각이다. 대북 강경론을 주장하는 북한 출신 박사도 있지만 진보적 성향을 가진 연구자도 적잖다. 그는 “이 연구원 출신으로 대미 문제를 담당하게 된 K국장과 북한 문제를 맡게 된 J국장 등이 한미관계 재조정 및 대북관계 모색을 담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정원은 중요한 안보 사안을 다룰 때는 ‘보지 못한 것’이 없도록 간부 간 토론을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간부가 한미관계 재조정과 대북접촉 방안에 우려를 표명했는데, 이렇게 되면 이 안건들은 추진하기 어려워진다. 한 관계자는 “국정원은 이 문제를 진급으로 풀어왔다”고 말했다. 반대하는 이들은 상위 계급으로 진급시켜 보직을 내놓게 했다는 것이다. 상위 계급일수록 계급정년이 짧아 당사자는 바로 퇴직해야 한다. 퇴직을 좋아하는 이들은 없으니 국정원 간부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논쟁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진급 러시가 국정원을 집단사고(Group Think) 증후군에 빠지게 했다고 주장한다. 청와대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을 찾는 데만 혈안이 된 간부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총선을 의식한다면
국가정보원이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키자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원을 방문해 “적폐의 본산에서 국민을 위한 정보기관으로 변신해달라”고 연설했다. [사진 제공 · 청와대]
그는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800만 달러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발표하자 북한이 바로 “우리 민족끼리는 생색내기가 아니라 근본 문제 해결이 급선무”라고 대응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바란다면 더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를 위해 단거리미사일을 발사해 문재인 정부를 흔들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북한 측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 중국 문제에 집중해야 하고 재선도 해야 하니 단거리미사일을 쏘는 북한을 추가로 제재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한 것이 문재인 정부에는 기회라는 것이다. 이 기회를 잡으려면 국정원은 북한과 함께 국내 우파 세력의 여론을 돌려놓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는 여당도 학수고대하는 주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국내 여론 조성이고 언론의 협조인데, 이는 곧 국내 정치 개입이 될 수 있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서훈-양정철-김현경 회동이 일어난 이유는 짐작이 된다. 그러나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그들이 서울 시내 음식점에서 만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서 원장은 음지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정보원 행동 요령을 어겼다. 원장의 잠행을 위해 국정원은 다양한 안가와 식당을 운영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회동 사실이 폭로된 이후 김현경 기자는 공개적으로 회동 이유를 해명했고, 양정철 원장은 기자들을 만나 비보도를 전제로 설명했다. 그러나 서 원장은 정보맨으로서 부주의했다.
한 관계자는 “국정원장이 국내 문제에 관심 없다는 것은 난센스다. 지금도 K차장 휘하에는 국내 문제를 정리해 원장에게 올린 후 파기하는 일을 거듭하는 팀이 있다. 국내를 모르면 해외와 대북 정보를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바라는 일을 해야 하는 국정원과 문재인 정부가 만들고자 하는 국정원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서 원장은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을까 싶어 집단사고의 부담을 무릅쓰고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출신을 끌어들였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 정보 수장이 될 개연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국정원 측은 뒤늦게 "국내문제를 원장에게 올린 후 파기하는 팀을 운영한 적은 없다, 국내 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담당하던 조직은 해체했기에 관련 예산과 인원 수단도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관련 법이 개정되지 않았기에 상당한 인원과 예산을 사용하는 국내지부를 여전히 운영하고 있는 상태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국내부서 인원 재배치 등은 국감 등을 통해 여러 차례 국회 정보위 등에 보고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서 원장이 정치인인 양정철 원장과 언론인인 김현경 기자를 만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반론 및 정정보도문▼
주간동아 6월 7일자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 음식점에서 길을 잃다' 기사중 "지금도 국내 문제를 정리해 원장에게 올린 후 파기하는 팀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국정원은 "서훈 원장 취임 이후 국내정보 수집ㆍ분석 조직을 해체하였고 현재 관련 업무를 하지 않고 있다"며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알려왔습니다.
또 "반대하는 직원을 상위계급으로 진급시켜 보직을 내놓게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J국장은 전략연구원 출신이 아니고, '보안심사권'은 1994년 폐지된 것으로 확인돼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