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스리그 우승컵(빅이어스)을 높이 들고 환호하는 리버풀FC 선수들. [AP=뉴시스]
프리미어리그에 관심 없는 독자라면 리버풀이 2018-19시즌 우승이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5월 12일로 막을 내린 이번 시즌 우승팀은 리버풀이 아니다. 30승 7무 1패(승점 97)로 역대 최고 승점을 기록했음에도 32승 2무 4패(승점 98)로 승점이 1점 앞선 맨체스터 시티 FC(맨시티)에 우승컵을 넘겨줬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처럼 빨간 유니폼을 즐겨 입어 레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리버풀은 본디 영국프로축구에서 최강팀 중 하나였다. 1892년 창단된 리버풀은 18회의 리그 우승 기록과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챔스) 5차례 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영국팀 중에선 유일하게 챔스 우승컵(빅 이어스)을 영구 소장한 팀이다. 2009년 전까지 UEFA는 3회 연속 우승이나 통산 5회 우승을 달성한 팀에 한해 빅 이어스의 영구 소장을 허용했다. 이런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팀은 6개 팀에 불과하다. 레알 마드리드, AFC 아약스 암스테르담, FC 바이에른 뮌헨, AC 밀란, FC 바르셀로나, 그리고 리버풀이다.
그런 영광의 팀임에도 리버풀에겐 여태 씻지 못한 오욕도 있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이후 단 한 차례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로 인해 국내에선 ‘리중딱’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까지 생겼다. ‘리버풀은 중간이 딱’이라는 말의 약자다.
그런 리버풀이 2018-19시즌 대변신에 성공했다. 전체 38경기 중 딱 한 번 패하며 시즌 막판까지 1위를 달렸다. 승점 97은 역대 최고 성적이다. 지난해 3패를 기록했지만 올해 전 경기를 승리한 맨시티의 막판 분전만 아니었다면 오욕의 역사를 씻을 수 있었다.
NYT가 주목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이었다. 만년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던 리버풀이 왜 갑자기 부활했는가. 결론은 200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세이버메트릭스’(수학과 통계에 입각한 야구 분석 시스템)를 축구에 적용한 성과였다는 것이다.
리버풀FC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공통점
2018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보스턴 레드삭스(왼쪽), 리버풀FC와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주 존 헨리. [동아DB, 위키피디아]
헨리는 2010년 리버풀 인수 이후 축구 통계분석 전문가인 이언 그레엄을 영입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이론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레엄은 전 세계 축구선수 10만 명 이상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는 통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2015년 독일 분데스리가 출신인 위르겐 클롭 감독을 영입한 것도 그레엄의 통계분석의 산물이었다.
올해 52세인 클롭 감독은 2000년대 들어 중·하위권을 맴돌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이끌고 2010-11시즌과 2011-12시즌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에도 도르트문트는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주축 선수의 부상과 이탈로 2014-15시즌에는 7위로 순위를 마감했다. 이로 인해 클롭의 지도력 역시 저평가된 상황이었다.
리버풀은 그런 클롭을 전격 영입했다. 숨겨진 이유는 그레엄의 분석 결과 당시 유럽 프로축구팀 가운데 가장 운이 없던 팀이 도르트문트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마땅히 2위를 했어야 할 팀이 7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레엄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통계 중 하나로 얼마나 많은 골 찬스를 만들어내느냐를 꼽았다. 골 찬스에서 골이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운이 작용하지만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는 데는 클롭만큼 유능한 감독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3년간 리빌딩을 거친 리버풀은 결국 역대 최다 승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앙숙이 뉴욕 양키스라면 프리미어리그에서 리버풀의 앙숙은 맨체스터다. 과거 그 상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맨유)였다면 최근에는 펩 과르디올라를 감독으로 영입한 2016년 이후 승승장구 중인 맨시티라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 북서부 항구도시인 리버풀(인구 43만)과 그 항구를 통해 원료와 제품을 수송하던 공업도시 맨체스터(인구 50만)의 라이벌 의식은 산업혁명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면직기술력이 뛰어난 맨체스터가 공업도시로 각광받자 그 수출항 역할을 도맡으며 영국 최대 수출항이 된 리버풀도 번영을 맞게 된다.
그러다 1894년 맨체스터는 공산품을 직접 수출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하고자 맨체스터에서 아일랜드해로 연결되는 당시 유럽 최대운하를 건설한다. 그 타격은 고스란히 리버풀에 전가되면서 두 도시의 빈부격차가 벌어졌고 지역감정의 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20세기 후반 맨체스터는 금융과 상업 중심 도시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반면, 리버풀은 쇠락한 항구도시가 되면서 그 골이 더욱 깊어졌다.
승점에선 졌지만 머니볼에선 이긴 리버풀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FC 바르셀로나를 꺾은 뒤 리오넬 메시를 껴안고 있는 위르겐 클롭 감독(왼쪽)과 리버풀FC 연구소장 이언 그레엄. [AP=뉴시스, NYT]
리버풀은 절망하지 않았다. 챔스 우승의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리버풀은 챔스 4강전에서 메시와 수아레스가 이끄는 세계 최강의 바르셀로나를 만나 1차전에서 0-3으로 패했지만 2차전에서 4-0으로 대역전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올랐다. 그리고 6월 1일(현지시각) 결승에서 손흥민과 해리 케인이 이끄는 토트넘 홋스퍼를 2-0으로 완파하고 6번째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사실 이번 시즌 리버풀의 성적은 여러모로 맨시티를 앞선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리버풀이 이번 시즌 1억5200만 파운드(약 2270억 원) 넘는 수익을 기록해 맨시티보다 144만 파운드(약 22억 원)를 더 벌어들였다”며 “이는 TV 중계에서 리버풀이 맨시티를 앞선 결과”라고 전했다. 리버풀은 또 챔스 우승으로 1900만 유로의 우승상금과 매 경기 승리 수당을 합쳐 7435만 유로(약 987억 원)의 수익도 챙겼다.
이는 세이버메트릭스에 기반한 과감한 투자의 결과이기도 했다. 리버풀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어리그 공동득점왕(22골)을 2명이나 보유하고 있다. 이집트 출신 모하메드 살레(26)와 세네갈 출신인 사디오 마네(27)다. 각각 2017년과 2016년 거액을 주고 데려온 공격수들이다.
리버풀FC의 수비수 버질 판 데이크, 공격수 모하메드 살레 · 사디오 마네, 골키퍼 알리송 베케르(왼쪽부터). [AP=뉴시스,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 홈페이지]
리버풀의 선수 구성을 보면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어벤저스급이다. 물론 선발의 전권은 클롭 감독에게 쥐어져 있다. 하지만 그에게 해당 선수들의 구체적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랩톱 가이’ 그레엄의 치밀한 분석을 빼놓을 수 없다.
실제 그레엄은 축구 경기 보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해당 경기에서 나온 패스 성공률과 방향, 볼 점유율 같은 수치와 통계로 시합을 분석한다. 2011년 영화화돼 유명해진 ‘머니볼’은 이제 야구뿐 아니라 축구까지 깊이 침투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수학을 못 해도 축구를 잘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