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중식 기자]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학생의 생일잔치를 소재로 그 유족과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는 이 영화의 숨은 보석은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편지’라는 노래다. 영화는 끝났지만 남겨진 감정의 여운을 추스르기 바쁜 관객의 어깨를 도닥여주며 ‘서두르지 마시라’고 말해주는 듯한 노래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깊은 밤에 잠에서 깨면/ 새벽은 저만치 멀고/ 길~었던 내 밤은 이루지 못한 또 하나의 꿈을 꾸네/ 언제쯤일까~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기다린다면 너를 다시~ 안을 수 있을까~/ 밤은 어차피 지나~가~겠지/ 부질없는 생각도 끝이~ 나겠지~/ 머물~렀던 너의 고운 자리만/ 반짝인다 널 기억~한다~.’
아들 수호와 사별한 순남의 마음이 담긴 노래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노래는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심금을 울린다. 영화가 지극한 슬픔을 담아냈다면 노래는 그런 슬픔을 함께 견뎌준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래서일까,
주섬주섬 흐트러진 감정과 짐을 챙기던 관객들은 다시 정좌한 채 노래를 끝까지 듣게 된다. 영혼까지 힐링해주는 듯한 그 목소리에 취해.
그 목소리가 왠지 낯설지 않게 들리는 건 왜일까. 가수 이름만으로 그 이유를 단박에 눈치챈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1980~90년대 초반 민중가요를 접하고 불렀던 4050세대에게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영화 ‘1987’에서 엔딩 곡으로 등장한 ‘그날이 오면’과 ‘민주’ ‘벗이여 해방이 온다’ ‘저 평등의 땅에’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처럼 시위 현장에서 수없이 흘러나오던 노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바로 ‘민중가요의 디바’로 불린 윤선애다.
윤선애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들을 다시 들어봤다. 놀랍게도 피 끓는 청춘에 불을 지르는 불꽃 같다고 여겨지던 목소리에 이미 위무와 진혼의 애수가 찬란히 녹아 있음을 발견했다. 혹자는 ‘1980년대 가장 홀리(holy)한 목소리’라고 평하기도 했다.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 84학번인 그는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와 민문연(민중문화운동연합) 산하 노래모임 ‘새벽’,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객원가수로 10년 가까이 활동했다. 함께 활동한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이 모두 솔로앨범을 내며 가수가 됐지만 1993년 ‘새벽’이 해체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2004년 첫 솔로앨범 ‘하산’을 내고 2009년 ‘아름다운 이야기’, 2012년 ‘그 향기 그리워’로 3집 앨범을 발표했다. 2016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와 2017년 ‘내가 거기로 갈게’ 같은 디지털 싱글은 좋은 반응을 얻더니 ‘편지’를 통해 대중에게 다시 성큼 다가섰다. 기온이 섭씨 27도로 치솟은 4월 22일 그가 사는 경기 의왕시의 백운호숫가 카페에서 그 미스터리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났다.
혜은이 노래 부르던 여학생, 아크로폴리스광장에 서다
“시사회에서 처음 영화를 보면서 제 노래도 들었죠.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 나오니까 제 노래는 특별히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이렇게 인상적으로 들으셨다니 감사한 마음이네요.”청아한 목소리의 그는 150cm 안팎의 아담한 체구였다. “에디트 피아프랑 같은 키”라며 해맑게 웃는 그에게 따라다니는 ‘무용담’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1984년 10월 서울대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총학생회가 출범하던 날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로 시작하는 ‘민주’를 홀로 열창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까지 다 끌어모았다는 그 전설의 무용담.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가 애창곡이던 신입생이 뭘 알고 불렀겠어요. 제 음색이 독특하다며 눈여겨본 선배들이 있긴 했지만 정작 무대에는 한 번도 세우지 않더니 그날 갑자기 1년 위 선배가 ‘너 이 노래 아니?’라고 묻더라고요. 서클룸에서 두어 번 불러봤다니까 연습 몇 번 시키더니 총학생회 발대식이 있는 줄도 모르던 저를 내보냈어요. 1000명 넘는 사람이 모여 있어 엄청 떨었는데 막상 노래를 시작하니 그 사람들이 그냥 한 덩어리로만 보여서 4절이나 되는 노래를 무사히 마치고 내려왔죠. 한참 뒤 들었는데 그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한 분이 제 노래를 듣고 인생관이 바뀌어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를 차리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해 7월 대중음악계도 단구의 걸출한 여대생 가수가 출현했다. ‘J에게’로 강변가요제에서 우승한 이선희다.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가수라는 점에서 두 사람이 닮았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하지만 윤선애에겐 가수보다 교사가 돼야 한다는 절박함이 강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홀로 월남한 실향민이셨어요. 이북에선 제법 잘살았다는데 월남하고 나서 용접하는 노동자로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반공의식이 투철하셨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함께 펑펑 울었고, 5·18광주민주화운동도 당시 뉴스에서 나온 대로 북에서 사주한 폭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대학 와서 그 사건의 실체를 접하고도 한동안 반신반의했으니까요. 게다가 어려운 가정형편에 1남3녀의 장녀였던지라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 아빠는 나를 지켜줄 수 없으니 내가 지켜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억울한 일을 안 당하려면 교사라도 되자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대입 이후엔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당시 불법이던 입주과외를 해야 했고요.”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학창생활을 하던 1학년 여학생은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서클 선배들을 따라 일요일 아무도 없는 녹음실을 빌려 노래 한 곡을 녹음했다. 공돌이, 공순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작업장타령’이었다. 이 노래가 수록된 테이프가 나오고 얼마 안 돼 입주과외를 하던 집으로 경찰이 들이닥친다. 불온한 노래를 너무 절절하게 불렀다는 이유로 남대문경찰서 대공분과로 끌려가 2주나 구류를 살게 된다.
“테이프 제작을 주도한 선배들도 1주일 구류를 살았는데 제가 가장 오래 유치장에 있었죠. 그때만 해도 너무 순진해서 진술서를 너무 솔직하게 쓴 게 문제가 됐나 보더라고요. 노래를 부를 때 느낌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우리 아버지가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는 노동자고, 나도 대학 못 갔으면 여공이 됐을지 몰라 우리의 얘기라는 생각에 공감하며 불렀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출신 환경부터 ‘나쁜 애’로 찍혀버린 거죠.”
‘러시아에 관한 명상’
[홍중식 기자]
“당시 몸도 편찮았는데 길거리에서 ‘너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설득하는 거예요. 제가 못 하겠다는 이유를 죽 나열했더니 ‘그럼 넌 노래만 해’라고 해서 ‘새벽’에 들어가게 됐죠. 1984년 창단 공연 ‘또다시 들을 빼앗겨’와 함께 결성된 새벽은 주로 졸업생 중심으로 구성돼 한참 동안 제가 막내였어요, 그래서 저는 진짜 노래만 불렀어요.(웃음) 최근에 만난 어떤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누나는 옛날에 그런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뭘 그렇게 몰라? 그 정도의 사상도 안돼?’라고.(웃음) 제 경험과 느낌이 동조해 노래를 부른 것이지, 머릿속의 어떤 사상과 논리를 갖고 한 게 아니었어요.”
1991년 옛 소련이 무너지면서 새벽의 주요 구성원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념과 사상을 중시하던 이들일수록 그 충격이 더 컸다고 한다. 1993년 새벽의 마지막 합동공연 제목이 ‘러시아에 관한 명상’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히려 초창기 도리질하던 윤선애가 끝까지 남았다. 1988년 중학교 교사가 됐다 4년 반 만에 그만두고 그 와중에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새벽을 지켰다.
“저는 뭐든지 끝을 보고 싶어요. 처음엔 무서웠지만 일단 숲에 발을 디딘 이상 그 숲의 끝에 뭐가 있는지는 보고 싶었습니다. 교사를 그만둔 것도 한 반에 60명 되는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성대에 무리가 와 노래하는 일과 병행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한 2~3년간은 새벽에서 매달 주던 30만 원의 생활비로 버티다 결국 학원 강사가 됐죠. 과학을 가르치니 수강생이 그렇게 많지 않은 데다, 마이크를 사용할 수 있어 목에 무리가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그 학원에서만 벌써 20년 넘게 가르치고 있어요.”
새벽 해체 이후 그가 계속 노래를 해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처음에는 ‘자신의 음악적 고향은 어디인가’라는 화두를 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같은 분들은 노래도 잘했지만, 곡도 쓰고 연주도 되는 싱어송라이터였어요. 반면 저는 노래만 할 줄 아니,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뭘 할 수가 없었죠. 게다가 당시만 해도 노래는 그냥 해야만 되는 거였지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어요. 무대에 서면 높은 낭떠러지 위에 제가 밟고 선 땅덩어리만큼만 발을 디딘 채 위태롭게 서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걸 또 이겨내겠다고 목에 힘을 잔뜩 준 채 노래를 불렀으니 오죽 힘들었겠어요. 그러다 새벽이 해체되니 내 음악의 뿌리가 과연 뭔가, 내 음색에 맞는 노래는 과연 뭘까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그날이 오면’의 작곡가로 새벽을 이끌던 문승현 선배가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너는 국악의 정가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해 10년 정도 열심히 정가를 배우며 목소리를 갈고닦았어요.”
음악적 아버지와 만남
그러다 새벽에서 노래운동을 했던 친구의 기획사에서 첫 솔로앨범 ‘하산’을 발표한 뒤 1세대 포크송 가수인 김의철을 만나게 된다. 김의철은 김광석의 노래로 뒤늦게 유명해진 ‘저 하늘의 구름 따라(불행아)’를 고교생 시절 발표한 음악가다. 유신독재 시절 검열로 난도질 당한 데뷔 앨범을 발매중단시키고 독일과 미국에서 클래식기타를 공부하며 상업성을 배격한 2장의 앨범을 냈다. 이들 앨범은 ‘저주받은 걸작’ 반열에 오르며 언더그라운드 가수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존재다.“지금까지 벌써 14년째 매주 파주에 있는 김의철 선생님 댁을 방문해 함께 노래를 부르며 배우고 있어요. 제가 노래를 부르고 나면 ‘조금만 힘을 빼고 불러볼래요. 노래는 울림이에요. 내가 울리면 공간도 함께 울려요’나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노래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겠어요’ 같은 말씀을 해주시는 게 다예요.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 말이 정말 깊은 내공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선생님은 그냥 읊조리는 게 노래가 되는 분이에요. 그런 분과 노래하면서 제 마음에 평화와 평온이 깃들게 됐고 비로소 노래하는 게 행복해졌어요.”
자신의 음악적 고향이 ‘클래식에 기초한 김의철의 포크송’임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던 윤선애는 갑자기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리며 “아버지인 거야, 아버지”라고 중얼거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부성애를 느껴보지 못했다는 그는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나서야 아버지가 깊은 영혼의 상처를 입었음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공학적 머리는 비상했지만 인간관계가 늘 서툴렀어요. 돌이켜보면 선천적으로 아스퍼거증후군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전쟁을 겪으며 가족과 헤어지고 어렵게 가장이 돼 살려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러니 아내와 자식에게는 무뚝뚝한 폭군으로밖에 안 비친 거죠. 김의철 선생님은 인간적으로도 그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신 분이에요.”
그렇게 자신의 인생과 화해하면서 그 목소리에 담긴 치유력도 더 깊고 강력해진 것 아닐까.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일종의 공공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노래하는 즐거움을 일깨워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 중학생 때 교회 성가대 무대에 세워준 지휘자 선생님, 중창반에서 함께 노래했던 고교 친구들, 노래의 사회적 역할을 일깨워준 대학 선배들, 그리고 김의철 선생까지 수많은 사람이 공들여 만든 목소리이기 때문에 공공재처럼 쓰여야 한다며. 또 스스로 빛나기보다 누군가의 쓰임을 받아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목소리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그 쓰임을 기다리며 계속 갈고닦고 있다고.
그 말을 들으니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그때 나를 안아줘요/ 오늘 차마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 대신’이라는 후렴구의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나 ‘고개 들어봐/ 눈물 흘리지 마/ 내가 거기로 갈게/ 녹슬지 않은 우리 추억이 있는/ 거기로 갈게’라고 읊조리는 ‘내가 거기로 갈게’ 같은 노래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편지’ 역시 ‘생일’의 이재준 음악감독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를 듣고 처음부터 윤선애를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다.
당나라 문인 한유는 자연은 계절마다 잘 우는 것을 빌려서 운다며 이렇게 읊었다. ‘새는 봄을 울고, 천둥은 여름을 울며, 벌레는 가을을, 바람은 겨울을 운다’고. 그럼 사람을 빌려서 우는 건 무엇일까. 시대가 아닐까. 윤선애의 목소리야말로 그렇게 시대가 빌려서 우는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짧은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