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경의 미식세계

화려한 도시에서 발견한 다정한 맛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한 기쁨 주는 재래시장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18-12-24 11: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적도 아래쪽, 남반구에 위치한 나라는 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더운 날의 크리스마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흰 눈으로 뒤덮인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할 수 없고, 빨강과 초록이 어우러진 털양말이나 장갑도 기분 좋게 낄 수 없다. 모름지기 크리스마스는 추워야 제맛 아닌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즐겁게 걸을 수 있는 이유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람들 사이를 상쾌하게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해가 일찍 지는 탓에 도시의 조명이 서둘러 빛을 밝히니 그만큼 낭만의 밤이 계속돼 기쁨을 준다.

    강남엔 은마종합상가, 강북엔 광장시장

    어른 아이 모두 좋아하는 은마종합상가 분식과 칼국수. [사진 제공·김민경]

    어른 아이 모두 좋아하는 은마종합상가 분식과 칼국수. [사진 제공·김민경]

    종교나 나이와 상관없이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다양한 추억을 선사하는 날이라 반갑지만, 차분한 분위기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다. 서울 명동 거리를 걸어도 외국인으로 가득해 어깨만 더욱 시려온다. 화려한 거리보다 아늑하고 따뜻한 곳으로 찾아들고 싶다. 

    오래된 동네에는 그만큼 오래된 시장이 있다. 서울 강북 쪽에는 워낙 유명한 시장이 많다. 남대문시장, 광장시장, 중부시장, 동대문시장을 비롯해 동네 곳곳에 큰 재래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일찌감치 들어선 서울 강남에도 사람 냄새 폴폴 나는 시장이 있다. 오래전에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 상가에는 강북 재래시장 못지않게 세월과 인정이 묻어나는 시장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1976년 들어선 은마아파트는 단지 규모만큼 시장 역시 대단하다. A동과 B동으로 나뉜 은마종합상가에는 온갖 먹을거리가 가득하다. 어물전, 정육점, 과일과 채소 가게, 떡집, 반찬 가게 등에서는 빼어난 먹을거리들이 앞다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전을 지지고, 붕어빵을 굽고, 참기름을 짜고, 미숫가루를 만드는 냄새 덕에 상가를 걷는 내내 식욕이 돋는다. 

    순대를 함께 파는 족발집, 김밥과 찐빵을 파는 만둣집, 칼국수와 수제비를 파는 식당, 떡볶이와 튀김 등을 파는 분식집, 옛날식 닭튀김을 파는 가게는 비좁은 식탁에 옹기종기 앉아 허기를 달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말 많은 대치동 금싸라기 땅에 있는 상가라지만 지하 1층의 물가는 여느 재래시장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상인 대부분이 30년 넘도록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음식 솜씨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외에 잠실동 장미아파트 상가, 논현동 영동시장 골목에도 오래된 맛집이 여럿 있다. 



    광장시장의 육회. [사진 제공·김민경]

    광장시장의 육회. [사진 제공·김민경]

    강북으로 넘어오면 광장시장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밤마다 노란 전구가 반짝이며 사람들로 붐비는 부침개 골목과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육횟집, 약방의 감초처럼 꼭 챙겨 먹고 싶은 마약김밥이 유명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남대문시장이다.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 다양한 포장지,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달콤한 과자와 사탕,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이 길가 상점에 가득 진열돼 있어서다. 이를 벗어나면 남대문시장의 명물로 불리는 갈치조림 골목이 있고 도가니탕으로 유명한 은호식당, 꼬리찜이 맛있는 진주집도 보인다. 해가 지고 상점들이 문을 닫으면 남대문시장 골목에 포장마차가 하나 둘씩 불을 밝힌다. 낮과는 전혀 다른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연말에 가고 싶은 재래시장을 딱 한 군데만 고르라면 나는 좀 멀리 떠나고 싶다. 바로 경북 경주의 성동시장이다. 1971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동시장은 문어와 돔베기를 파는 골목이 유명하다. 경북에서는 명절뿐 아니라 중요한 날이면 귀한 문어와 돔베기를 상에 올리기 때문에 이 골목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경주 성동시장 한식 뷔페는 일품

    경주 성동시장. [사진 제공·김민경]

    경주 성동시장. [사진 제공·김민경]

    여행객은 주로 먹자골목 쪽으로 모인다.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우엉김밥도 먹자골목에서 맛볼 수 있다. 군더더기 없는 숙련된 솜씨로 김밥을 통통하게 말아 내는 어르신들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시장 안에서만 최소 40년 넘게 장사를 해왔기에 눈길은 오고가는 손님을 살펴도 손길은 야무지게 김밥을 말아 낸다. 김밥 옆에는 굵직한 쌀 떡볶이가 걸쭉한 국물과 함께 끓고 있고, 꼬치에 꿴 도톰한 어묵이 천천히 익어간다. 분식집의 음식 구색이 조금 남다른데 번데기, 김치전이나 부추전, 잡채 등을 함께 파는 곳이 꽤 많다. 

    경주 성동시장의 명물 한식 뷔페식당. [사진 제공·김민경]

    경주 성동시장의 명물 한식 뷔페식당. [사진 제공·김민경]

    먹자골목에는 한식 뷔페식당이 여럿 있다. 내가 주로 찾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6000~7000원에 20여 가지 반찬과 함께 밥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 많이 먹을 수 있어 좋기보다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 즐겁다. 

    제철 나물 무침과 묵나물 볶음, 경북 특유의 말린 생선을 이용한 짭조름한 조림, 어디에서나 인기 있는 오징어채와 쥐포 같은 마른반찬, 개운한 해초 반찬이 맛나고 김치는 시원한 겉절이도 있지만 조핏가루(산초·제피)를 넣은 독특한 것도 있다. 매일 먹어도 반가운 달걀말이와 소시지부침에 동그랑땡이나 두부구이를 곁들여 내기도 한다. 버섯, 콩나물, 감자로 만든 반찬은 흔하지만 없으면 섭섭하기에 주인 손맛대로 다양한 맛을 뽐내며 구색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찐 호박잎과 양배춧잎, 데친 다시마가 쌈 채소 대신 언제나 등장한다. 여기에 강된장, 젓갈, 참기름, 양념간장이 제공되니 입맛대로 간을 맞춰 먹을 수 있다. 시원하게 끓인 콩나물국 등 맑은국은 얼마든지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연말이 너무 분주해 불안하거나, 예상치 못하게 삭막해 쓸쓸하다면 오래된 시장에 가보자. 하루가 바삐 돌아가는 그곳에서는 특별한 날이 오히려 무색해 특별할 것 없는 스스로가 편안해진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