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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1개 개발하는 데 통상 15년 걸려
신약 1개를 개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5년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자료에 따르면 5000~1만여 개 신약 후보물질 가운데 전 임상시험, 즉 동물시험에 들어가는 물질 10~250개를 선정하는 데 5년가량 소요된다. 전 임상시험 과정을 통해 임상시험에 들어갈 물질을 9개 정도로 추리는 데 추가로 약 2년, 의미 있는 물질 1개를 발견하고자 1상·2상·3상 시험을 거치는 데 약 6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신약 판매 허가를 받는 데 약 2년 등 총 15년이 걸리는 것이다(표1 참조).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비용도 천문학적이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제약사들은 지난 15년간 신약 개발에 약 520조 원을 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항공산업의 5배, 컴퓨터산업의 2.5배에 이르는 수준이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율도 높은 편이다. 글로벌 제약사 가운데 연구개발 투자비 지출 면에서 상위 그룹에 속하는 스위스 제약사 로슈, 노바티스의 2016년 연구개발비는 각각 85억 달러(약 9조5820억 원)에 달했다. 이는 매출액 대비 각각 21.8%, 19.9%에 해당한다. 심지어 미국 제약사 리제네론 파마슈티컬스의 경우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율이 60.3%에 이를 정도로 신약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많은 글로벌 제약사가 신약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전 임상시험 단계에서 실패한다면 임상시험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줄일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른다. 임상 3상까지 도달해 신약 개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좌절하는 사례도 적잖은데, 이 경우 많게는 수조 원의 연구개발비가 날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신약 개발은 대표적인 고위험-고수익 사업으로 꼽힌다.
이런 가운데 몇 해 전부터 인공지능을 활용한 신약 개발 방식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이를 바이오헬스 산업에 적용하는 사례가 늘었고, 나아가 신약 개발에도 접목하고 있다. 물론 인공지능 컴퓨터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자료를 일일이 검색하고 모든 경우의 수를 실험하면서 증명해야 하는 기존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혁해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미 글로벌 제약사들은 인공지능을 이용한 신약 개발에 착수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제약사 화이자는 인공지능으로 면역항암제 신약 개발에 착수했고, 이스라엘 제약사 테바는 인공지능으로 호흡기와 중추 신경계 질환은 물론, 만성질환 약물 복용 후를 분석해 신약 개발에 들어갔다(표2 참조).
수년 걸리는 신약 후보물질 탐색 하루 만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약 개발의 어떤 과정에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을까. 배영우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전문위원 겸 메디리타 대표이사는 “신약 개발의 모든 단계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단계의 경우 예전에는 기존 문헌을 일일이 분석해야 했다. 하지만 의미 있는 후보물질을 찾는 데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사람의 노력과 수고를 덜 수 있다. 또 전 임상시험 단계에서 기존 데이터를 활용해 시뮬레이션을 해보거나 임상시험 단계에서 후보군을 추리는 데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매우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통상적으로 제약사에서 신약 연구개발을 시작하면 책임자가 암, 노인성 질환, 치매 등 연구 대상 질병을 특정한다. 이후 관련 논문 400~500개를 필터링해 연구자 10여 명에게 40~50개씩 나눠주고 일정 시간 뒤에 모여 리뷰한다. 새로운 작용기재에 대해 논의한 뒤 타깃 단백질을 연구하고, 후보물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까지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이 걸린다.
관련 질병에 따라 검토해야 할 논문 수도 달라진다. 신약 개발을 할 때 유전자 연구를 먼저 하는데, 대표적으로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 p53의 경우 관련 문헌만 10만 건이 넘는다. 연구자 1명이 한 해에 조사할 수 있는 자료는 많아봐야 200~300건이다. 단순 계산해도 문헌 조사에만 수년씩 걸린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후보물질 탐색 과정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기존 논문 같은 문헌 정보뿐 아니라 특허 정보, 유전체 정보 등 다양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 할 수 있다. 또 인공지능은 한 번에 100만 건 이상의 논문 탐색이 가능하다. 과장해 말하면 연구자 수십 명이 매달려 1~5년간 해야 할 일을 하루 만에 정리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후보물질 선정 후 단계인 전 임상시험과 임상시험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전 임상시험 데이터들을 분석해 예측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연구자가 시험에 들어가면 비용과 시간이 크게 절약된다. 또한 시험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여러 시행착오를 줄여 시험 대상 동물이 죽는 경우도 상당수 줄일 수 있다.
임상시험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환자군 모집에 들어가는 노력이 감소한다. 제약사들은 보통 임상시험 대상자를 포스터 공고로 모집하는데 대조군인 건강한 사람, 질병에 걸린 사람 등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만약 병원 진료기록을 토대로 인공지능을 활용해 시험 대상자를 검색한다면 관련성이 높은 환자군을 빠르게 선정할 수 있다. 나아가 인공지능을 통해 환자군의 의료기록에 따라 투여 약물을 어느 정도 시험해야 하는지 임상시험 맵핑(maping)을 얻을 수도 있다.
신약 개발은 한마디로 시간싸움인데, 이를 단축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신약 개발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배영우 전문위원은 “제약사는 임상시험에 들어가기 전 특허 등록을 마친다. 그런데 특허 보전 기간은 길어야 20년이다. 임상시험이 오래 걸릴수록 시판 이후 판매수익을 올릴 기간이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이를 단축한다면 자연히 제약사 매출은 크게 늘어난다. 물론 제약사의 이윤 증대에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제약사는 매출의 20%가량을 신약 개발에 재투자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환자들에게도 이득”이라고 설명했다.
2년 전부터 제약사와 스타트업 제휴 활발
지난해 5월 17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한국미래포럼(KOREA FUTURE FORUM 2017)’ 행사에 참석한 알렉스 자보론코프 미국 인실리코 메디슨 최고경영자가 ‘제약 AI가 이끄는 신약개발혁명’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뉴스1]
특히 왓슨은 의료산업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활용되고 있다. 2016년 아일랜드 의료기기 업체 메드트로닉은 왓슨을 활용해 스마트폰 저혈당 예측 애플리케이션(앱)을 공동 개발해 시제품을 공개했다. 미국 연구소 뉴욕게놈센터는 왓슨과 함께 암 게놈 연구를 공동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암 환자 200명의 종양에서 DNA와 RNA 서열 및 임상 데이터를 분석한 뒤 환자의 암 유발 변이에 초점을 맞춘 타깃 치료제를 검색하는 방식이다.
왓슨은 신약 개발에서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6년 화이자는 IBM의 인공지능 ‘왓슨 포 드러그 디스커버리(Watson for Drug Discovery)’를 이용해 면역 및 종양학 연구와 신약 개발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화이자는 다년간의 신약 개발 노력으로 암과 관련된 많은 양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신약 개발과 병용 요법을 연구 중이다.
테바도 IBM과 업무협약을 체결해 호흡기·중추신경계 질환 분석 및 만성질환 약물 복용 후 분석 등 신약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테바 제품을 복용하는 환자 가운데 약 2억 명의 데이터를 모아 부작용 사례와 추가 적응증(특정 약제나 수술에 의해 치료 효과가 기대되는 질환 또는 증세)을 확보한 뒤 신약 개발을 할 계획이다.
IBM이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지만 유럽과 미국의 인공지능 스타트업도 두각을 나타낸다. 영국 인공지능 스타트업 베네볼런트AI(BenevolentAI)는 2016년 11월 미국 존슨앤존슨 계열사인 얀센과 독점적 라이선스 제휴계약을 체결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임상단계 후보물질들의 평가와 난치성 질환에 대한 타깃 신약 개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베네볼런트AI는 논문 수백만 건을 분석해 루게릭병 치료제를 2건이나 발견해 화제를 모았다. 또한 최근에는 파킨슨병 환자의 졸음 치료용 의약품에 대한 임상 2상 시험을 시작하기도 했다.
미국 바이오 벤처기업 아톰와이즈(AtomWise)는 2년 전 미국 제약사 머크와 손잡고 신경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아톰와이즈는 2015년 아톰넷(AtomNet)이라는 인공지능 시스템 개발에 성공해 다수 벤처캐피털로부터 약 67억 원 규모의 시드펀딩을 받았다. 아톰넷은 서로 다른 후보물질의 상호작용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물질 간 결합 가능성을 학습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설계됐는데, 하루 100만 개의 화합물을 선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아톰와이즈는 시판 중인 7000여 종의 약물 가운데 에볼라 치료에 효과가 있는 신약 후보물질 2개를 하루 만에 찾아내 이름을 알렸다. 현재 미국 제약사 MSD도 아톰와이즈와 함께 신약 개발을 진행 중이다.
이 밖에 스코틀랜드의 인공지능 기반 신약 개발 전문기업 엑스사이언티아(Exscientia)는 2017년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 영국 제약사 GSK 등과 협력계약을 체결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해 당뇨와 심혈관질환 치료를 위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있다. 또 미국 스타트업 투사(TwoXAR)는 2017년부터 일본 제약사 산텐과 함께 인공지능 신약 탐색 플랫폼 듀마(DUMA)를 활용해 녹내장 신약을 개발 중이다. 듀마는 약물과 질병의 예상치 못한 연관성을 찾는 클라우드 기반의 솔루션으로, 의미 있는 후보물질을 확인하고 전 임상시험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특화돼 있다.
일본에서도 신약 개발을 위한 인공지능 활용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일본은 제약사와 인공지능 기업이 개별 협약을 맺고 연구하는 형태가 아니라, 산학연관 협력 프로젝트로 공동 개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는 일본
2017년 다케다약품공업, 후지필름, 시오노기제약 등 제약업체와 후지쯔, NEC 등 IT기업 50여 개가 일본 문부과학성 산하 과학기술연구소인 이화학연구소, 교토대와 함께 신약 관련 인공지능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이들은 각 기업과 연구소, 대학에서 선발한 연구자 100여 명이 팀을 이뤄 관련 분야에 특화된 인공지능을 개발 중이다.연구 분야도 이화학연구소나 교토대병원의 환자 임상데이터, 질병 관련 단백질, 슈퍼컴퓨터를 사용해 얻어낸 신약 후보물질 등 다양하다. 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 딥러닝을 통해 적합한 신약 후보물질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이 경우 신약 후보물질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을 2~3년가량 줄일 수 있고, 부작용이 염려되는 신약 후보물질을 인공지능이 미리 제거해 안전성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프로젝트에 일본 정부도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7년 예산 요구안에 25억 엔(약 252억 원)을 책정했고 프로젝트가 성공하기까지 최종적으로 100억 엔 규모로 지원해갈 예정이다. 해당 프로젝트에 해외 IT기업이나 제약회사도 참여할 수 있게 해 2020년에는 인공지능 기술로 개발한 신약을 보급하는 것이 목표다.
이러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최대 제약사 다케다약품공업의 글로벌 매출 순위는 17위로 화이자, 노바티스 등 글로벌 제약기업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다. 신약 개발에 쏟는 비용 역시 이들의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현재 진행하는 인공지능 신약 개발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일본제약 산업은 크게 도약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