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철 기자]
충무공의 동상은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다. 최근 관광지로 떠오른 전남 여수 구시가지 로터리에도, ‘다찌집’으로 뜨고 있는 경남 통영 이순신공원에도 있다. 현충사가 있는 충남 아산시 신정호에도 대형 동상이 새로 들어섰다. 그럼 11월 30일로 서거 113주기를 맞는 충정공의 동상은 어디에 있을까.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초입에 자리한 우정총국 건물(사적 제213호) 뒤쪽에 딸린 작은 공원 후미진 곳에 세워져 있다. 아마 전국에 딱 하나 있을 텐데, 조계사를 찾는 신도들도 충정공 동상이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외진 곳이다.
11월 14일 오전 기자가 찾아갔을 때 동상 주변은 노숙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벌써부터 술 냄새가 진동했다. 동상 뒤편으로 그들 소유인 듯한 간이침구가 쌓여 있었다. 얼핏 지린내가 난다 싶었는데, 동상 뒤 담벼락이 그들의 공중화장실로 쓰이고 있음을 목격했다.
대한제국이 수수깡으로 지은 집처럼 무너질 때 500년 왕조를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분의 동상이 이렇게 수모를 겪어도 되는 걸까. 이 참담한 모습을 제보한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부터 이 동상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내력을 들었다.
지린내 맡으며 방치된 동상
충정공 민영환 동상이 위치한 서울 견지동 우정총국 건물 뒤쪽 공원 담벼락에 볼 일을 보고 있는 노숙자. [조영철 기자]
광복 후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던 임정 인사들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3의사(義士)의 기치를 높였다면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계정의 고귀한 희생을 가장 먼저 챙겼다. 서대문과 마포를 잇는 도로의 이름을 충정로로 기념했던 게 광복 후 1년도 안 된 1946년 미 군정기였다. 충정로 인근 아현동의 주한 프랑스 대사관 자리에 계정의 별장이 있었다. 또 1947년 위당 정인보, 민세 안재홍, 우사 김규식 등 3명이 힘을 합쳐 계정의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추모사업을 추진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위당, 민세, 우사가 모두 6·25전쟁 때 납북돼 유명을 달리하면서 추모사업도 동력을 잃었다. 그나마 1955년 민충정공기념사업회가 재결성돼 ‘민충정공유고’(전 5권) 번역이 이뤄졌다. 학계에서도 동상 건립 운동이 일어 이승만 정부 시절 안국동 로터리에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후 명맥이 끊기면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정 교수가 이런 실태를 파악하게 된 것도 최근이다. 3년 전 ‘고종시대 정치 리더십’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계정의 리더십 연구를 위해 유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연구 성과를 담아 2017년 발간된 책을 유족에게 전달하면서 계정이 홀대받고 있음에 눈 뜨게 됐다고 한다.
“민영환 선생의 업적 가운데 하나가 1900년 조성한 남산의 장충단입니다. 당시 표훈원(현 국가보훈처) 총재였던 그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을미사변 때 순국한 장졸들을 위해 봄과 가을마다 제를 지내려고 조성한 곳입니다. 일제가 이곳을 가만뒀을 리 만무하죠. 조선 왕실의 궁궐인 창경궁을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전락시켰듯이 1919년 제단을 없애고 장충단공원을 조성했습니다. 1932년엔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를 짓고 1937년엔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을 세웠죠. 그나마 황태자 시절 순종이 전서체로 직접 쓴 ‘奬忠壇’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그 비석 뒤에 비 조성 경위를 쓴 글은 민영환 선생이 직접 쓴 것인데 지금은 대부분 마모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충신으로 역사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계정의 자취가 이렇게 잊히고 유실된 채 방치돼도 괜찮은 것일까. 내년 2월 정년퇴직을 앞둔 정 교수가 발 벗고 나선 이유도 거기 있다.
“충정로 또는 장충단으로 이전하자”
서울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 내 장춘단비. 황태자 시절 순종이 쓴 전면의 전서체 글씨는 남아 있지만 장충단 조성 경위를 밝힌 충정공 민영환의 글씨는 대부분 마모돼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사진 제공 · 정윤재]
다행히 계정의 유물은 고려대박물관에 잘 보존돼 있다. 계정의 피 묻은 옷을 걸어둔 전동 집 방바닥에서 자라나 ‘혈죽(血竹)’으로 불린 대나무를 비롯해 충정공이 착용했던 대한제국 군복과 흉배, 대리석 소금함 등이다. 계정의 손자로 고려대 교수 출신인 민병기 전 국회의원이 일찍이 기증한 유물들이다.
충무공과 충정공. 공훈의 무게를 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충무공의 백분지일에 해당하는 관심이라도 충정공에게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즉사 사즉생’이란 충무공의 유훈은 충정공의 유서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