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사건 수사 결과가 발표된 11월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숙명여고 앞에서 전국학부모단체연합 회원들이 숙명여고 교장, 교사의 성적 조작 죄 인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인지왜곡’을 교정해야 하는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쟁의 극대화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는 성장이 멈춘 듯한 모습이다. 경제성장률은 낮아지고, 좋은 일자리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예전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국가시험을 통해 9급 공무원이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9급 공무원 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전문직의 수입도 예전보다 훨씬 못한 데도 전문직이 되는 과정은 더 치열해졌다. 정해진 자리는 한정됐는데,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는 경쟁이 극대화된다. 경쟁에서 앞서야 자신에게도 과실이 주어진다.이러한 경쟁 상황에서는 남들이 모르는 편법 · 불법적 방법으로 앞서고자 하는 ‘악마의 유혹’을 느낄 수 있다. 누가 그런 제안을 한다면 당연히 거절해야 하지만, 그릇된 욕심과 승부욕 탓에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 있다. 1등이 독식하는 세상, 일부 상위층이 부를 독점하는 현실, 중간 계층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사회 구조가 지속되면 제2, 제3의 숙명여고 사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먼저 교사의 직업적 소명이 있긴 하지만 아버지 처지에서는 아이들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치열한 입시 경쟁을 대신해주고 싶은 욕심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을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번 일을 계기로 부모와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막는 ‘상피제(相避制)’를 도입한다고 한다. 지금 같은 극한 경쟁 체계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것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는 판단에 따라 내놓은 대책일 터다.
둘째, 타인에 대한 불신이 높아서다. 필자는 환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을 믿느냐”는 질문을 종종 던진다. 환자 중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괴롭히거나 해칠 것이라고 생각해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대부분 “세상 사람들을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다른 질문도 던진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중 어느 쪽이 많을까”라고 물으면 많은 환자가 “세상은 사악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 정말 선한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 정도일 것”이라고 답한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인지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고 한다. 필자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치료를 시도한다. 왜곡된 인지를 교정해야 앞으로 세상을 덜 힘들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매일같이 벌어지는 강력 범죄나 갑(甲)의 횡포, 교육 현장의 부정 · 부패 등을 떠올리면 ‘어쩌면 환자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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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열망이 높아서다. 작용이 강하면 반(反)작용도 강해진다. 경쟁의 극대화와 타인에 대한 높은 불신이 ‘작용’이라면,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열망은 ‘반작용’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좋은 삶은 인류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했다. 그는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새로운 정치를 제안했는데 시민의식, 희생, 봉사,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토론, 불평등 개선을 위한 연대, 도덕적 참여 정치 등을 제시했다.
숙명여고 사건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공정성과 정의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매우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대입에서 ‘깜깜이 수시’나 ‘학종’(학생부종합전형) 비중을 줄이고, 정시 선발 비율을 높이라고 요구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정한 입시제도와 철저한 관리·감독안이 마련돼야겠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도덕성을 높이려는 분위기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교 내신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문제가 되듯,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 청년실업, 한탕주의 등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선한 의지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어릴 적 착한 행동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칭찬을 한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올라가 선행을 더 많이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더는 주변의 관심과 칭찬이 아닌, 마땅히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 즉 누군가로부터 인정이나 보상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남을 돕거나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결과보다 동기나 과정을 더욱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성숙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