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영 기자]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11월 7일 보건복지부(복지부)의 개혁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국민 눈높이에 맞추라”며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연금 개혁은 다시 안갯속이다.
이에 대해 허만형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출산율 저하와 고령인구 증가로 연금 개혁은 시급한데, 복지부는 정공법 대신 쉬운 방법을 택한 거 같다”며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르듯 보험료 소득상한액을 올려 소득재분배와 사회안전망을 함께 구축하는 틀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조정실 심의관을 역임하고, 한국정책학회 회장과 중앙대 행정대학원장을 지낸 대표적인 연금 전문가다. 다음은 그와 일문일답.
국민연금 개혁 문제가 다시 불붙었다.
“연금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사회안전망은 나이가 들어도, 장애가 있어도, 가족 중 한 명을 잃어도, 삭막한 현실에서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주는 장치다. 그리고 사회안전망 가운데 가장 기본은 국민연금이다. 옛 농경사회에서는 가족이 그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복지부는 소득대체율과 노후소득보장 강화 방안을 담은 안을 제시했지만 문 대통령이 재검토 지시를 했다.
“연금제도를 시행한 1989년 소득대체율은 70%였지만, 연금 고갈 등을 이유로 1998년에는 60%, 2007년부터는 매년 0.5%p씩 줄어 2028년이면 40%로 떨어진다. 올해는 45%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고령사회에 대한 우려가 컸고, 연금 고갈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소득대체율을 40%로 낮춘 거다. 그런데 그 40%라는 소득도 40년을 꼬박 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다. 근로자가 보통 20~30년간 근무하다 퇴직하면 소득대체율은 30%가 안 된다. 20년 가입자는 25%가량 된다. 퇴직 전 월 400만 원을 급여로 받던 사람의 연금 수령액이 월 100만 원 정도밖에 안 되니 ‘용돈 연금’ 얘기가 나오는 거다. 가뜩이나 노후 불안이 큰데, 급여 올려주겠다는 말은 없고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더 오래 내게 한다니 ‘퇴짜’를 맞은 거 같다.”
‘용돈 연금’ 얘기가 나오는 이유
[지호영 기자]
소득대체율을 낮추거나 보험료를 더 걷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까.
“그게 간단한 방법이지만, 소득대체율을 낮춰 재정건전성을 강화한다면 국민연금은 사회안전망이 아니라 휴지조각으로 전락한다. 고갈될 전망이니 연금보험료를 올려야 한다는 논리는 틀린 건 아니지만 설득력이 없다. 출산율, 고용률, 소득재분배 수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갈 위험성 때문에 보험료를 인상하는 안, 그리고 소득재분배율을 조정하는 안이 있으니 정책의 고객인 국민에게 어떤 안을 선호하는지 물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그게 현 정부가 강조하는 ‘숙의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허 교수의 대안은 뭔가.
“재정건전성을 높이는 방안은 연금피크제를 도입하거나 (국민연금 보험료 및 급여 수준 결정의 기준이 되는) 소득구간을 조정하거나,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을 ‘매칭’하는 중층연금을 구현하는 등 다양한 방법론이 있다. 그런데 사회안전망과 소득재분배라는 연금 성격에 가장 부합하는 방식은 보험료 부과 소득상한액을 조정하는 것이다.”
올해 최고 소득상한액은 468만 원이다. 2분기 6분위 근로자 가구(474만144원) 소득과 비슷한데, 상한액을 더 올려야 한다는 말인가.
“말씀 잘하셨다. 상한액이 468만 원이다 보니 매월 468만 원을 버는 사람이나 4680만 원을 버는 사람이나 내는 보험료는 똑같다. 전체 국민연금 가입자의 14%가량이 상한액에 머물러 있다. 생각해보라. 대기업 과장이 회장과 국민연금 보험료가 같고 연금 급여도 같다는 게 말이 되나. 이 기형적인 소득구간을 조정해야 한다.”
왜 조정되지 않았을까.
“1989년 최고 소득상한액은 월 360만 원이었고, 상위 10%가량 됐다. 그런데 20년간 상한액을 조정하지 않고 방치하다 2009년 전재희 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 이후 평균 소득의 3년간 평균액 변동만큼 연동해 조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올해 7월부터 내년 6월까지 상한액이 468만 원이 된 거다. 30년 전 최고 소득상한액(360만 원)이나 올해 최고 소득상한액(468만 원)이나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별 차이가 없다. 한 치도 못 나갔다. 진보 정부든, 보수 정부든 기업을 의식하다 보니 소득상한액은 사실상 올리지 않으면서 국민 부담을 강요했기 때문인데, 이는 복지부의 직무유기다. 최고 소득상한액은 복지부가 디폴트(기본 설정값)로 해 최저임금 인상하듯 자동적으로 올려야 했다. 현재는 작은 고통이지만 미래에는 큰 기쁨을 주는 게 연금이자 사회안전망이고, 정부는 이런 연금 기조를 유지하면서 국민과 기업을 설득해야 한다.”
“보건복지부의 직무유기”
어느 정도까지 소득상한액을 높여야 한다고 보나.“국민연금은 사회보험이기에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내야 한다. 나는 이 상한선을 소득 9분위 상한선(2분기 전체 가구 기준 712만2549원)에 맞추는 게 옳다고 본다. 소득 6분위 가구나 가장 많이 버는 10분위(1113만4309원) 가구나 똑같이 보험료를 내는 게 말이 되나. 소득 5분위 이하 가구는 비교적 적게 내면서 더 받고, 그 이상은 조금 더 내면서 덜 받는 게 소득재분배라는 사회보험의 성격에도 맞다. 소득액이 많을수록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누진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득재분배의 수단이자 자본주의 국민으로서 기본 의무다.”
소득상한액을 높이면 고소득 가입자의 보험료는 더 걷을 수 있겠으나, 돌려줘야 할 연금도 그만큼 커지는데.
“소득 수준이 높은 가입자에게 무조건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최고 소득상한액에 해당하는 가입자가 올해부터 20년간 가입하고 20년 수령을 전제로 해도 수익비는 1.4배다. 20년보다 더 오래 생존하면 수익비는 훨씬 높아진다. 웬만한 민간 금융이자보다 높다. 고소득자도 많이 벌 때 많이 내 노후 보장이 될 만큼 연금을 받는 게 낫지 않나. 소득재분배 기능을 어느 선까지로 할지에 따라 연금기금 운용은 크게 개선되고, 고소득자들은 실질적인 노후 보장을 받을 수 있다.”
보험료를 더 내야 하는 기업의 부담은….
“지금까지 이 문제를 풀지 못한 것도 기업 눈치를 많이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국민연금은 사용자와 근로자가 절반씩 보험료를 내기 때문에 기업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회안전망 = 소득주도성장 기초
11월 8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 출석해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동아DB]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게 국민소득을 높여 지갑을 열게 함으로써 국민이나 기업이 ‘윈윈(win-win)’하자는 거 아닌가.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돈을 가장 많이 써야 할 4050세대는 노후가 불안하니 지갑을 열지 않는다. 아무리 돈을 풀어도 불안한 노후 탓에 자기 주머니에 넣고 간직만 한다면 구매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식에게 노후를 맡기겠다며 자신의 지갑을 여는 부모 세대도 거의 없다. 그러니 내수는 침체되고 기업은 부메랑을 맞는다. 복지와 경제는 같은 수레바퀴이고, 결국 소득주도성장을 실현할 기본 수단은 사회안전망 구축이다. 그래야 기업도 살고, 경제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책은 10년 앞을 내다봐야 하는데….”
문 대통령은 연금 개혁안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맞추라”고 했다. 소득상한액 인상이 ‘국민 눈높이’에 맞을까.
“국민 눈높이라니…. 정치인은 종종 국민 눈높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멋지게 해석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를 살리는 방안을 만들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국민연금 개혁은 ‘유능한 지도자는 손대기 싫어하고, 무능한 지도자는 손을 댄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복잡 미묘한 문제다. 그러니 연금 같은 백년대계(百年大計) 정책은 ‘국민 눈높이’가 기준이 아니라, 정책이 가진 논리와 성격에 맞춰 우리 환경에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연금 소득상한액을 올리는 문제는 국무회의 의결로 시행령을 고치면 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인사로부터 ‘개인보험인 건강보험을 국가가 나서 가입하라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치명적인 비판을 들으면서도 50개 주를 돌며 ‘오바마케어’ 도입을 설득했다. 어렵겠지만 국민연금 문제도 지도자가 소신을 갖고 진지한 설득과 협의로 풀어가야 한다.”
김연명 신임 대통령사회수석비서관은 동료 교수인데, 곁에서 본 김 수석은 설득과 협의로 풀어갈 인물인가.
“김 수석은 연금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김 수석이 아무리 식견을 갖췄다 해도 정책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자신의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되느냐가 중요하다. 의지를 갖고 소득상한액을 현실화하면서 연금 개선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소득상한액을 높여도 국민연금만으로는 노후 보장이 어려울 거 같다.
“그렇다. 중층연금이 필요한 이유다. 2005년 말 국무조정실 심의관으로 일할 때 고령사회 문제가 화두가 돼 퇴직연금을 도입했고, 중층연금 제도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런데 퇴직연금은 임금 근로자에 한정돼 아쉬움이 컸다.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한 개의 통장으로 예금, 적금, 채권, 주식 등 각종 금융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계좌)를 도입했는데, 당초 ISA가 가진 연금 기능은 빼고 금융 기능만 살려 ‘반쪽 ISA’가 됐다. 칠레에서 시작된 ISA는 1970년대 후반 연금 고갈로 공적연금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높아지자 공적연금을 포기하고 강제적 개인연금으로 도입한 제도다. 나는 자영업자들을 위해 이 제도에 연금 기능을 포함하는 정책적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ISA, 퇴직연금, 국민연금기금은 우리 금융의 튼튼한 인프라가 된다.”
‘지방복지’로 초고령사회에 대비해야
김수현 신임 대통령정책실장(오른쪽)과 김연명 신임 대통령사회수석비서관(태극기 왼쪽)이 11월 11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첫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기초연금을 대폭 인상해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부족분을 메우자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는 ‘복지 포퓰리즘’이고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연금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국민 가운데 소득인정액이 일정 수준(단독가구 131만 원, 부부가구 209만6000원) 이하 대상자에게 정부 일반회계 예산으로 지급하는 공공부조다. 빈곤층이나 차상위계층이 타깃이다. 반면 국민연금은 개인이 보험료를 내고 적립해 받는다. 기초연금 인상은 정치인에게 연금 문제를 푸는 ‘꿀맛’이 될 수 있지만, 재원(財源)과 성격이 다른 연금은 화학적 결합이 안 된다.”
고령사회 문제는 농어촌이 더 심각한데.
“그렇다. 조사해보니 2016년 기준 노인인구 비율은 군(郡) 26.2%, 시(市) 14.8%, 구(區) 13.6% 순인데, 연금 급여 수준은 구의 경우 연간 1179만2000원, 시는 889만4000원, 군은 560만8000원이었다. 연금 수급률 또한 구 51.8%, 시 49.9%, 군 46.1% 순으로 나타났다. 전국 83개 군과 74개 시의 지역주민이 적정 수준의 연금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국민연금을 개혁한다면 이러한 고령화 속도와 차이를 감안해 틀을 바꿔야 한다고 본다. 노인이 지갑을 열어야 실버산업이 발달하고 고용도 창출된다. ‘농어업인 연금’이란 이름으로 시행 중인 연금보험료 지원 제도나 농지를 역모기지 방식으로 농어업인에게 제공하는 농지연금 제도 등을 노인인구가 30%를 넘는 지역부터 중앙정부의 지원 아래 확대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지방복지’ 모형을 만들어 초고령사회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