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4년 한 해 국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22만3522건, 일평균 613건이다. 전국에서 운행되는 영업용 차량은 택시 25만4731대(9월 말 기준), 버스 12만4511대, 화물차 38만2954대(이상 10월 기준)다. 지난해 국내 공항을 드나든 항공기는 37만1754대. 교통서비스의 안전은 이용자 생명을 책임지지만, 일부 운수업 종사자는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특히 고령화에 따른 질환이나 안전 운행을 위협하는 증상을 갖고 있음에도 먹고살기 위해 ‘죽음의 휠’을 돌려야 하는 이들이 적잖은 것.
택시업계에서는 이미 2년 전 ‘치매 택시’ 논란이 크게 일었다. 2013년 5월 강원 춘천에서 A(62)씨가 몰던 택시가 도로변에 주차된 차량을 들이받고 사고 현장을 벗어났다. 들이받힌 차량이 앞에 서 있던 화물차를 다시 받을 만큼 큰 충격이 있었지만 A씨는 사고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운전을 계속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사고 한 달 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뺑소니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안전 사각지대 놓인 개인택시
개인택시기사였던 이모(68) 씨도 건강 악화로 사고를 내 택시운전을 그만둔 경우다. 이씨는 “예전에 운전 중 졸음이 와서 길가에 정차하고 낮잠을 잤다. 일어나니 전방 20m 정도가 안 보였다. 겨우 운전해서 귀가했는데 병원에서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해서 그 후로 3개월간 더 운전했다. 비슷한 증상이 반복되고 사고가 연속으로 일어나 택시운전을 그만뒀다”고 말했다.택시기사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만 65세 이상 택시기사는 5만6000여 명으로 전체 택시기사의 20%를 차지한다. 70대 택시기사는 2010년 8473명에서 2014년 1만5539명으로, 같은 기간 80대 택시기사는 110명에서 214명으로 각각 2배씩 늘었다. 서울의 경우 개인택시기사의 고령화가 전국 평균보다 높다. 만 65세 이상은 전국 개인택시기사의 30.8%이며 70세 이상도 11.9%이다.
고령 택시기사들은 안전사고에 취약하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0년 2315건이던 고령 택시기사의 사고 건수는 2014년 4091건으로 76.7% 증가했다. 2014년 만 65~69세 택시기사의 사고 건수는 2705건으로 평균 12.1명당 1건이 발생했다. 70세 이상 택시기사의 사고는 1386건으로 11.7명당 1건이었고 40, 50대는 12.3명당 1건이었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안전실험 결과, 고령 운전자는 위기 상황에 대한 반응 속도가 젊은 층보다 60%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며 “고령 운전자의 사고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택시나 버스, 화물차 등 영업용 운송수단 운전사는 면허를 취득하기 앞서 운전적성정밀검사를 받는다. 교통사고 원인이 되는 행동, 심리적 특성을 측정하고 기억력, 공간감각, 속도 예측 등을 확인하는 검사다. 면허를 딴 후 큰 사고를 내거나 6개월 이상 입원 경력이 없으면 다시 검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 고령 운전사는 5년마다, 비고령 운전사는 10년마다 정기적성검사를 받을 의무가 있을 뿐이다. 교통안전공단 관계자는 “중상 이상의 사고(택시와 버스는 전치 3주 이상, 화물차는 전치 5주 이상)를 일으키거나 6개월 이상 병원에 입원한 운전사는 특별 운전적성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응시만 하면 검사를 통과할 수 있다. 합격, 불합격은 따로 없다”고 설명했다.
안전사고 예방에 가장 취약한 대상은 개인택시기사다. 법인택시기사는 회사에서 매년 시행하는 건강검진을 받지만 개인택시기사는 검진 자체가 의무사항이 아닌 데다 설령 검진을 받았다 해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외부에 알릴 의무가 없다. 개인택시기사 김모(49) 씨는 “고령의 법인택시기사가 퇴사 후 개인택시기사로 전업하는 경우가 꽤 있다”며 “택시회사의 경우 월 40시간 이상 야간 운전을 하는 운전사를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받게 하지만, 개인택시기사는 그럴 의무가 없다. 개인택시기사는 업무시간이 불규칙한 편이라 건강 상태가 나쁜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택시 및 버스기사의 고령화에 따른 안전사고를 막고자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규칙 개정을 추진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만 65~69세 운전사는 3년마다 자격유지검사를 받고 70세 이상은 매년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택시업계의 반발로 버스기사에 한해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심리상담? 해고될 각오해야”
고령 운전자의 사고 위험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12년 5월 강원 홍천군에서 안모(여·76) 씨가 몰던 승용차가 버스와 충돌해 4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했다. 동아DB
하지만 지금까지 교통사고 원인을 운전자의 질병이나 상태별로 분류한 통계는 국내에 전무한 실정이다. 경찰청 관계자에 따르면 “교통사고 원인을 분석할 때 운전자의 신체·정신적 질환이나 졸음에 따라 통계를 내지는 않는다. 신호나 속도위반 등 교통법규를 위주로 분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백 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항공기 조종사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03~2012년 조종사의 자살 비행으로 인한 항공사고가 전 세계적으로 8건이나 있었고, 올해 3월 탑승객 150명 전원이 사망한 독일 저먼윙스 비행기의 추락 원인 역시 조종사의 불안장애였다. 그렇다면 국내 항공업계와 국내 조종사의 사정은 어떨까. 항공사마다 연 2~3회 조종사를 대상으로 신체검사와 심리상담을 실시하지만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완벽하게 잡아내지는 못한다.
익명을 요구한 항공기 조종사 B(34)씨는 “저먼윙스 사고 이후 국내 항공사들이 조종사들의 심리 안정에 더욱 신경을 쓴다”면서도 “하지만 조종사의 정신질환 또는 우울증이 쉽게 드러나거나 조종사가 자진해서 자기 질환을 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귀띔했다. B씨에 따르면 조종사들은 자신의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회사에 밝히기를 두려워한다.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것이 염려돼서다.
B씨는 “항공기 조종사는 조종만이 자기 주특기이고, 일자리를 잃으면 다른 할 일이 없다. 회사에서는 ‘아픈 데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하라’고 하지만 조종사들은 ‘해고되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말 안 한다’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 질환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언행에 문제가 있어 보이면 제보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조종사나 승무원들이 업무 외 어울리는 시간이 많지 않아 타인의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한 증상이 아니면 알아채기 어렵다”고 말했다.
“종사자 안전 위해 국가가 나서라”
연 1000시간 이상 비행하는 항공기 조종사는 전체의 10~20%에 달한다. 이기일 항공안전정책연구소 소장이 2013년 11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18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비행을 위한 이동시간’을 합쳐 연 1000시간 이상 비행하는 조종사는 대한항공 13.6%, 아시아나항공 19.8%로 나타났다. 이기일 소장은 “조종사들의 장시간 노동이 피로를 가중해 운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국토교통부(국토부)는 2015년 12월부터 “항공기 조종사의 정신건강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겠다”며 “정신건강 전문병원과 심리상담기관을 지정해 조종사들의 정신적 안정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한국민간항공조종사협회는 12월 1일 보도자료에서 ‘국토부의 방침은 심리상담 또는 정신과 진단 결과의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공기 조종사 C(33)씨는 “개인정보 유출 방지가 관건”이라며 “비밀이 유지되지 않으면 국토부 방침은 조종사들의 반발만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는 “운수업 종사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윤 전문의는 “특히 택시의 경우 연령 제한이나 건강 상태로 진입 장벽을 높이면 고령층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며 “직업 운전사, 조종사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조절하고 임금 수준을 높여야 과로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운수업 종사자들의 건강관리를 강화하는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박상권 교통안전공단 교통안전교육처 부연구위원은 “선진국에서는 직업 운전사의 치매 등 정신질환을 방지하는 프로그램이 잘 마련돼 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숙면을 취하며 뇌 기능을 활성화하는 교육이 일과 병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령 운전사의 인지장애가 가속화될 것”이라면서 “업계 종사자들에게 건강·안전관리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 먼저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공인된 기관이 설립돼야 교통안전지수가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