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페이지 터너]
몇 해 전 이맘때였다. ‘효리네 민박’ 덕에 누구나 아는 동네가 된 제주 소길리. 한라산 중산간에 위치한 이 마을은 개발이나 관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가까이엔 숲이 아무렇게나 우거졌다. 한 시간에 한 번 농어촌 버스가 다니는 외진 곳이었다. 거기서 하루를 머물렀다.
좋은 사람들과 밤새 술을 마신 후 늦도록 잤다.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텃밭이라고 하기엔 꽤 많은 작물이 가꿔진 마당의 평상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저녁 즈음에 길을 나섰다. 차가 없었기에 애월 큰 도로까지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소길리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상가리, 하가리 같은 이름이 쓰인 이정표가 보였다. 눈앞에 숲이, 그 앞에는 바다가 들어왔다. 아름답게 푸르던 하늘이 더 아름답게 물들 무렵이었다. 말 그대로 한 줄기 바람이 바다에서 산 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가을이구나. 계절의 스위치가 켜졌다. 장필순과 조동익이 사는 소길리에서 보낸 하루가 영원히 새겨지는 찰나였다.
장필순의 새 앨범이자 8번째 작품인 ‘soony eight : 소길花’는 그 시간들을 본능적으로 소환한다. 장필순은 2002년 6번째 앨범인 ‘Soony 6’ 이후 음악과 인생의 동반자 조동익과 함께 소길리로 내려갔다. 거기서 밭을 일구고 장작을 팼다. 유기견을 키우고 꽃을 길렀다. 도시 음악가로서 삶을, 섬 촌부의 그것이 자연스럽게 대체했다. 뜨문뜨문 음악을 했다. 함춘호와 함께 현대기독교음악(CCM) 앨범을 냈고, 가끔 서울에 올라와 공연을 했다.
음악가로서 장필순과 제주 생활인으로서 장필순은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많은 음악가가 대체로 그렇다. 7집 ‘Soony Seven’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겪은 그 하루가 ‘소길花’로부터 소환된 건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이 제주의 무료한 일상과 찬연한 자연이 빚어낸 열매이기 때문이다.
2015년 봄부터 지난겨울까지 발표된 10곡의 싱글에 2곡의 신곡을 얹어 총 12곡을 담았다. 앨범 크레디트(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명단)를 살피며 음악을 듣다 보면 장필순의 삶이 느껴진다. 그를 찾아 제주에 왔던 벗과 가족이 어떤 마음으로 이 노래들을 선물했을지 느껴진다. 이적과 이상순 같은 후배의 노래가 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조동진이 남긴 가사와 장필순이 다시 부른 노래가 있다. 동경과 설렘, 나른함과 반추의 정서가 낮잠처럼 머문다. 한숨처럼 흐른다. 어쩌면 지난 세기에 청춘이란 단어가 가졌던 낭만과 연민이 잘 숙성된 음악이자 소리다. 욕심의 부질없음을 자연스럽게 놓았을 때 남은 무위의 꽃이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가장 개인적인 시적 순간들이, 가장 극적으로 머릿속을 맴돌게 한다.
음반으로 음악을 듣는 게 당연하던 시대처럼, 이 앨범은 배경음악(BGM)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장필순이 직접 쓴 곡의 해설과 김광석, 최성원, 김현철 같은 뮤지션의 젊은 시절 사진부터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까지, 한 인간으로서 장필순이 오롯이 담긴 음반을 꼭꼭 씹어 삼켜야 한다. ‘소길花’는 그때 피어난다. 무선통신신호가 잡히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산책처럼, 액정이 아닌 눈으로 보이고 메모리가 아닌 두뇌에 새겨지는 자연과 삶이 이 앨범 속에 단아하게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