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여백의 미를 한껏 살린 무대, 극 전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소품의 전면 배치와 그에 따른 빠른 장면 전환, 담금질된 몸과 말로 웃음, 눈물을 끌어내는 배우들의 열연…. 무엇보다 어린 영혼 하나를 지키려고 5명이 목숨을 바친다는 감동적 이야기로 객석은 눈물바다가 되고 커튼콜 때는 갈채가 쏟아진다.
동양적 복수의 드라마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조씨고아’에서 정영(하성광 분)이 성인이 된 조씨고아 조무(이형훈 분)에게 조씨 가문의 비극과 조무를 살리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알려주고 있다. [사진 제공 · 국립극단]
무려 5명의 목숨 값으로 살아난 고아는 자식이 없는 도안고의 양자가 돼 정영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인이 된다. 스무 살 장정이 된 조씨고아(趙氏孤兒) 조무(이형훈 분)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복수에 나서고, 길고 고통스러운 임무를 완수한 정영은 회한에 찬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조씨고아’의 원작은 13세기 중국 원대의 작가 기상군이 쓴 희곡이다. 연출가 고선웅은 이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각색했다. 원작에선 진왕이 둘이지만 진영공 하나로 통일하고, 정영의 아내는 남편의 뜻에 동참한 게 아니라 항거의 의미로 자결한 것으로 바꿨다. 또 진영공의 명에 따라 조씨 가문처럼 도안고의 가문도 3대가 멸문지화를 겪는 것을 보고 정영이 깊은 회한을 느끼며 숨지는 것으로 바꿨다.
그럼에도 불편함이 남는다. 공연의 완성도에 대한 것은 물론 아니다. 남의 자식을 구하려 어떻게 자기 자식을 희생시킬 수 있느냐는 현대적 인권의식의 산물도 아니다. 고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식을 아비의 사유물로 여겼기에 생사여탈권을 아비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씨고아’ 원작이 탄생한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한 불편함이다.
역사적 진실과 미학적 성취
연극 ‘조씨고아’의 미니멀한 무대. 이야기 전개에 꼭 필요한 소품을 공중에 매달아놓고 필요한 장면에만 내려놓는다(왼쪽). 강보에 싸인 조씨고아를 팽개쳐버릴까 고뇌하는 정영. [사진 제공 · 국립극단]
조씨고아를 살리려고 목숨을 바친 이들의 면면에는 송의 충신들이 투영돼 있다. 충의를 지키려 스스로 목을 베어 죽은 한궐에게선 명장 악비가 어른거리며, 정영의 아기를 조씨고아라 속이고 감춰주다 섬돌에 스스로 머리를 박고 죽은 공손저구에게선 여덟 살에 즉위한 송의 마지막 황제 조병을 등에 업고 투신자살한 육수부의 향기가 난다. 조씨고아의 절치부심 복수극에는 그런 한족의 집단적 르상티망(원한)이 충만하다. 동북공정이란 역사침탈을 겪은 한국에서 한번은 곱씹어볼 요소가 있다는 소리다.
한편 원작의 모태가 된 기원전 6세기 전후의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면이 많다. 연극에선 조순-조삭-조무 조씨 3대는 모두 충신이고 도안고는 간신인 것처럼 그린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의 재상 조돈(방패 순(盾)을 사람 이름에 쓸 때는 돈으로 읽는다)이 진영공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을 때 가문의 일원인 조천이 진영공을 시해한다. 조돈은 돌아와 진성공을 왕위에 앉히는데, 진영공의 총애를 받던 도안고는 이에 원한을 품고 조돈이 죽고 난 뒤 조씨 가문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더군다나 ‘춘추좌씨전’에는 더 기가 막힌 기록이 나온다. 조무의 어머니 장희공주가 시숙부 조영과 간통한 사실이 들통 나 조영이 추방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남동생인 진성공에게 조씨 일가가 언젠가 역모를 꾀할 것이라 일러바쳐 조씨 일가가 멸문지화를 겪었다는 기록이다. 두 기록 모두에서 한궐은 자결한 게 아니라 진성공에게 조무의 존재를 알려 조씨 가문의 봉작을 잇도록 주선했다고 나온다.
진나라는 기원전 376년 조(趙), 한(韓), 위(威) 세 나라로 완전히 쪼개진다. 조무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조, 한궐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한, 그리고 연극 말미에 잠시 등장하는 위씨 성 신하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위다. 따라서 ‘조씨고아’는 춘추전국시대 권력 각축의 과정에서 발생한 엽기적 사건의 주역을 성리학적 춘추필법(역사의 주역을 정파와 사파로 나눠 묘파)에 따라 재창작한 작품으로 봐야 한다.
그럼에도 주인공 정영을 운명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저하고 번민하고 후회하는 인물로 포착한 하성광 배우와 고선웅 연출의 착점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연극 속 정영은 의리의 화신이 아니다. 쓰디쓴 운명의 잔을 받지 않으려 핑계를 대고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목숨 무게가 더해지면서 그 운명과 뜨거운 포옹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년 세월을 ‘복수를 위한 기계’로 살았던 사내는 그 미션이 종료되는 순간 해탈이 아니라 환멸에 사로잡힌다. 복수는 정의가 아니며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지는 악순환만 낳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원작 희곡을 뛰어넘은 미학적 성취라 감히 말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