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도전! 골든벨’ 서울 배화여고편에 출연한 김현주 학생(배우 한가인)의 모습.
2000년 12월 22일 방송된 KBS ‘도전! 골든벨’ 서울 배화여고편 34번 문제입니다. ‘베이스볼 비키니’ 독자라면 정답이 ‘사이영 상’이라는 걸 모르는 분은 없을 터. 그런데 짙은 남색 털모자를 쓰고 출전한 이 학교 3학년 김현주 학생은 ‘자이언 상’이라고 써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18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30, 40대 야구팬이 이 오답은 물론이고, 학생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학생이 바로 이로부터 2년 뒤 16부작 드라마 ‘햇빛사냥’을 통해 ‘한가인’이라는 예명으로 연예계에 데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인 씨가 만인의 연인으로 지낸 건 잠시. 한씨는 2005년 소꿉친구였던 배우 연정훈 씨와 결혼식을 올렸고, 연씨는 이로 인해 남성들 사이에서 ‘견공자제분’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한씨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Say 연!’이라는 댓글이 달리곤 합니다. 그러면 다음 사람이 ‘정’이라 쓰고, 그다음 사람은 ‘훈’이라는 댓글을 답니다.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모범답안이 있지만 이 칼럼의 품격을 감안해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결혼하고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배 아파 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연정훈 씨는 확실히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배우가 연기보다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더 주목받는 게 꼭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Say 연!
올해 메이저리그에는 연정훈 씨와 정반대되는 사례가 존재합니다. 이 불쌍한 주인공은 제이컵 디그롬(30·뉴욕 메츠). 디그롬은 8월 14일 현재 평균자책점 1.81로 내셔널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7승(7패)밖에 거두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메리칸리그까지 포함해도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중인 선발투수는 디그롬 딱 한 명뿐입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불운한 사내
뉴욕 메츠 선발투수 제이콥 디그롬. [뉴시스]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제일 큰 이유는 득점 지원 부족. 디그롬이 등판했을 때 메츠 타선은 평균 3.46점을 뽑았는데, 이는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 77명 가운데 75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그래도 디그롬은 의연합니다. 그는 “우리 타자들이 점수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저 경기에서 이길 만큼 점수를 내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디그롬이 등판했을 때 메츠 타선이 리그 평균(4.50점)만큼 점수를 뽑아줬으면 어땠을까요. ‘득점²÷(득점²+실점²)’으로 계산하는 ‘피타고라스 승률’ 공식에 따르면 올 시즌 디그롬은 승률 0.861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24경기에 등판했으니까 이미 21승을 거뒀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선발투수가 모든 경기에서 반드시 승패를 기록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도 최소 15승 정도는 기록하고 있어야 오히려 정상일 겁니다.
디그롬이 평균자책점만 낮은 것도 아닙니다. 평균자책점은 수비가 도와줘도 내려갈 수 있는 기록. 이 때문에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에서는 투수 능력을 평가할 때 100% 투수 책임에 가까운 홈런, 삼진, 볼넷만 가지고 FIP(Fielding Independent Pitching)를 계산합니다. 디그롬은 FIP도 2.16으로 내셔널리그 1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승수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자이언 상 아니, 사이영 상을 타지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을 수상한 선발투수 가운데 승수가 가장 적었던 선수는 1981년 13승(7패)을 기록한 페르난도 발렌수엘라(58·당시 LA 다저스)였습니다. 단, 1981년은 파업 때문에 팀당 162경기가 아닌 102~109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습니다. 발렌수엘라를 제외하면 다들 15승 이상은 거뒀습니다.
메츠는 이날까지 116경기를 치렀으니까 시즌이 끝날 때까지 남은 건 46경기. 다섯 경기마다 한 번씩 등판한다고 가정하면 디그롬은 9번가량 더 마운드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 9경기에서 디그롬이 과연 8승을 기록할 수 있을까요? 만약 실패한다 해도 미국야구기자협회(BBWA) 소속 투표인단이 그를 사이영 상 수상자로 선정할까요? 아메리칸리그에서는 펠릭스 에르난데스(32·시애틀 매리너스)가 2010년 13승12패(평균자책점 2.27)를 기록하고도 사이영 상 수상자로 뽑힌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건 선수가 아니라 팀입니다. 그런데 야구는 투수에게 승패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개인에게 승패를 기록하는 건 야구, 야구와 이란성 쌍둥이라 할 수 있는 소프트볼, 그리고 아이스하키 정도밖에 없습니다. 아이스하키도 골리(골키퍼)에게 승패를 기록합니다.
왜 야구는 개인에게 승패를 기록할까
그러나 처음부터 투수에게 승패를 기록한 건 아닙니다. 야구에 승리투수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는 1884년입니다. 이 개념을 ‘발명’한 건 당시 ‘뉴욕타임스’ 야구 기자였던 헨리 채드윅(1824~1908)입니다. 채드윅은 ‘스카우팅 가이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스폴딩 가이드’ 1885년판(1884년 발행)에 처음 승리투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패전투수 개념은 1888년이 돼서야 등장했습니다.이것도 충분히 오래전 아니냐고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 규칙, 그러니까 △선발투수는 반드시 5회 이상 투구해야 하고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물러나야 하며 △이 투수가 물러난 뒤 팀이 한 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채 경기를 마쳐야 한다는 조건으로 처음 승리투수를 결정하기 시작한 건 1950년부터입니다. 메이저리그 역사학자들은 보통 이해 개막전 선발투수였던 레이 스카버러(1917~82·당시 워싱턴 내셔널스)를 현대적 의미의 첫 번째 승리투수로 봅니다.
그래서 개인에게 승패를 부여하는 게 잘못이냐고요?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런 기록이 없다면 디그롬 같은 투수가 불운하다고 평가할 수단이 부재할 테고, 그러면 숱한 야구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투수 개인으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그 덕에 우리는 야구를 보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회사도 많습니다. 어떤 일이 안 되는 게 꼭 직원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닐 텐데, ‘윗것’들은 신나게 밑으로만 화를 전달하기 바쁩니다. 그런 이야기는 세상에 없으면 없을수록 좋을 텐데 말이죠. 그렇다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랫사람이 화를 위로 올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그저 Say 김(아니면 원하는 성을 넣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