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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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시네+아트

관객을 끌어들이는 행위예술 같은 영화

루벤 외스틀룬드의 ‘더 스퀘어’

  • | 영화평론가 hans427@hanmail.net

    입력2018-08-14 11: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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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아이엠]

    [사진 제공·아이엠]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영화를 마치 행위예술(Performance Art)처럼 만든다. 아티스트의 낯선 동작이 이어지고, 그걸 보면서 고민하는 관객의 반응이 작품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기제를 닮아서다. 또 설치미술 같기도 하다. 낯선 대상과 그 앞에 선 관객의 난해한 표정이 서로 힘겨운 대화를 하듯 영화가 진행된다. 

    두 경우 모두 작품에 대한 관객의 개입이 뒤따르는데, 외스틀룬드의 영화는 현대예술의 그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세련되고 차가운 현대예술의 외관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관객의 강력한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외스틀룬드의 역설적인 개성일 테다. 그의 이름을 알린 전작 ‘포스 마쥬어’(2014)도 눈사태 직전의 위험 속에 가족을 남겨놓은 채 혼자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던 가장의 행위가 관객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야자수상(황금종려상) 수상작 ‘더 스퀘어’는 디스토피아로 변해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극이다. 스웨덴 현대미술관에서 책임큐레이터로 일하는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 분)의 다음 프로젝트 제목은 ‘더 스퀘어’다. 이를 알리려고 실제로 ‘사각형’ 설치물을 만들고, 그 안에 ‘우리 모두는 서로를 믿고 배려하며,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진다’고 써넣었다. 

    이후 크리스티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사각형의 슬로건’과 달리 타인을 믿지 않고, 배려하지 않으며, 권리만 요구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이기주의와 위선으로 범벅된다. 사실은 크리스티안 본인도 그렇게 행동한다. 이런 풍자적 에피소드들이 웃음을 유발하고, 또 종종 공포까지 느끼게 하며 묘하게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게 영화 ‘더 스퀘어’의 매력이다. 

    가장 많이 제시되는 질문은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 논쟁이다. 스타 예술가와 관객의 만남 시간에 어느 중년 남자가 어눌한 말투로 욕설을 내뱉고 있다.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남자는 정신장애가 있다고 사과하지만, 그의 욕설은 계속된다. 관객과 대화를 계속해야 할까. 혹은 그 남자를 퇴장시켜야 할까. 미술관의 홍보담당자들은 ‘더 스퀘어’ 프로젝트를 알리려고 어린이를 테러 대상으로 삼은 영상물을 만들어 유튜브에서 ‘대박’을 터뜨린다. 이런 비인간적인 ‘노이즈 마케팅’ 때문에 크리스티안은 사직하는데, 어느 기자가 질문했듯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를 막을 것인가. 



    압권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행위예술이다. 미술관 후원자들, 곧 거부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시간이다. 고릴라처럼 보이는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등장해 손님들을 위협하며 자리를 휘젓고 다닌다. 되돌릴 수 없는 폭력이 일어날 것 같은 그의 무서운 행위예술은 어디서 멈춰야 할까. 

    관객을 괴롭히는 ‘솜씨’는 ‘님포매니악’(2014)에서 배우들을 채찍으로 때리는 라르스 폰 트리에르의 사디즘과 맞먹는다. 그러면서 영화관 관객까지 ‘고릴라’의 행위예술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 힘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처럼 강력하다. 이런 부조리한 행위들의 연속 속에서도 결국 ‘믿음과 배려, 그리고 권리와 책임’이라는 ‘더 스퀘어’의 취지는 잃지 않는다. 세계 영화계가 외스틀룬드에 주목하는 이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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