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박영대 기자]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사진)은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 · 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4월 18일 ‘핵과 한반도, 그리고 동북아’를 주제로 개최한 제10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서 남북 종전 선언의 정치적 효과를 경계했다. 이어 “한국은 중재자가 아닌 당사자이기에 북한 비핵화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송 전 장관이 한 강연의 주요 내용이다.
오늘은 ‘핵과 한반도, 그리고 동북아’라는 주제를 그동안 북핵 협상 경험에 입각해 살펴보겠다. 물리적, 수학적 상황에만 원리가 있는 게 아니라 이 문제에도 원리가 있다. 과거 북한과 핵협상이 계속 실패한 데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먼저 동북아라는 지정학이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힘이 교차하는 진공 지점을 활용해 지금까지 핵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이 북한 비핵화를 위한 결정적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북핵 해결 이후 한반도 미래에 대한 미·중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전 선언보다 종전 위한 협상 선언이 우선
두 번째는 70년 동안에 걸친 불신이다. 특히 핵협상을 할 때 북한 카드와 미국 카드는 같은 종류가 아니다. 미국은 북한 측에 무슨 핵과 어떤 물질을 가졌는지 신고하고 폐기하고 검증하라고 요구한다. 물리적으로 분명한 행동이다. 미국이 줄 수 있는 것은 의회 승인과 법 절차 등 다분히 절차적이고 제도적인 부분이다. 북·미 수교도 많은 복잡한 과정, 즉 절차적인 것이다. 어느 누가 먼저 카드를 내놔야 한다.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뭘 믿고 목숨이 걸린 물건을 내놓겠느냐’ 하고, 미국은 ‘북한의 협박에 굴해 먼저 양보하는 일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상호 불신과 비대칭이 유지되고 있다.세 번째는 북한과 미국의 국내정치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미 수교는 물론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했고, 북한은 핵을 포기한다고 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핵 포기가 불안하니 선군정치를 들고 나왔다. 미국에서도 클린턴이 합의한 것을 부시가 다 바꾸고 폐기했다.
그동안 북핵과 관련해 세 가지 중요한 합의가 있었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 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북한 사찰 문제로 실패했다. 미국이 북한 사찰을 들고 나오니 북한에서는 남한 미군기지도 사찰하자고 나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같이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당시 우리는 미군기지 사찰은 말도 안 된다며 거부했다.
핵은 플루토늄, 농축우라늄으로 만드는 두 종류가 있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하고도 그때까지 안 돼 있던 우라늄 농축을 통해 핵개발을 계속했다. 그것이 북한이 잘못한 일이다. 북한 경수로 핵심 기술과 부품은 미국에서 나와야 하지만 미국은 원자력협정을 맺지 않으면 민감한 부품과 기술을 반출할 수 없다고 했다. 앞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고 하면 필경 경수로를 지어달라고 할 것이다. 돈은 우리가 댄다 해도 미국 상원은 ‘폐쇄된 국가와 어떻게 협정을 하느냐’고 반대할 테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을 향해 불가역적으로 핵을 폐기하라고 요구한다. 북한도 미국에게 대북제재를 해제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 군사훈련 중단을 불가역적으로 진행하라고 주장한다. 결국 보증을 서줄 수 있는 나라는 중국 정도인데 문제는 미·중이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비핵화 정의를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즉 스스로 핵우산을 만들어 쓴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미국의 핵우산을 치우면 북한도 핵우산을 치우겠다는 얘기다.
지금 미국이 요구하는 북·미 수교의 조건은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북한 핵시설 폐기, 인권 개선, 국가 투명성 등이다. 이런 것들을 1년 안에 끝내겠다는 의욕을 보인다. 문제는 ‘비핵화, 북·미 수교,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3개 바퀴가 같이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협상은 상대방 처지에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주장만 해서는 곤란하다.
이와 관련해 북·미 평화협정 얘기가 나오는데 법적으로 북·미 평화협정은 맞지 않다. 앞으로 한반도에서 평화를 지킬 당사자는 남북이다. 평화협정은 북·미 관계 정상화, 남과 북의 남북기본합의서 이행과 관계 개선, 남북미중 네 나라 간 체결, 유엔 지지 형식으로 가야 한다.
지금 전쟁을 끝낸다는 종전 선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군사적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과 정치적 선언이 그것이다. 지금 하자는 것은 정치적 선언이다. 종전 선언 후 비핵화 합의에 들어가면 분위기는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휴전 상태에서 전쟁이 끝난다고 하면 안보 측면에서 한미동맹 변화와 주한미군 병력 감축 등 많은 혼란이 생길 수 있다. 종전 선언보다 종전을 위한 협상 선언을 만드는 것이 맞다.
한국, 당사자로 단합된 목소리 내야
지난 10년 동안 6자회담이 무너진 이후 북핵은 방치돼왔다. 이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일괄 타결, 톱다운 방식, 2년 내 해결은 의욕 면에서는 좋지만 과욕이다. 북·미 수교 하나만 해도 힘이 든다. 미국 의회에는 상·하원의원 수를 빗대 ‘국무장관이 535명’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복잡하다. 제네바 합의와 9·19 공동성명도 다 위에서 하자고 해놓았지만 이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대북제재를 해제하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며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시간표를 정해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뒷문이 열린 기한은 안 된다. 2년 내 해결은 좀 어렵지만 미국의 확실한 핵우산 속에서 핵을 가진 북한과 살아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제일 큰 걱정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북핵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핵을 가진 북한과 공존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안전을 북한의 자비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북한이 우리를 상대로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입에 올리기도 거북스러운 소리다. 그런 상태가 되면 우리는 미국에게 말 한 마디 못 하고 살 것이다.
한국은 이 문제에서 중재자가 될 수 없다. 자기 문제를 자기가 중재하는 것도 어렵지만, 중재자는 중재 결과에 발언권이 없다. 그러니 우리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북제재를 해제하고, 당장 북한이 핵 폐기를 안 해도 동결하는 데 대한 감시체제를 확립하는 조건으로 거래해야 한다. 북한 핵시설과 핵무기 폐기 프로그램을 감시하는 체계가 확립되면,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도 가능하니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타협안으로 생각된다.
미국은 외교가 실패하는 곳에서 전쟁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아의 경우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입장을 세우려면 단합해야 한다. 내부 단합을 만들어내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정부는 의견을 모으고자 노력하고, 국민은 자신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합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지지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외교와 안보 문제에 관한 한 특히 국론이 통합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