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차모(30) 씨의 말이다. 미투운동(#Me Too)으로 성범죄 피해자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에게 언행을 조심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이에 사내 문화나 회식 등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학도 상황은 마찬가지. 술자리에서 일탈을 막기 위한 규칙 등이 생기며 대학가 술자리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일부 남성은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보느냐며 불만을 표출하지만, 대다수는 미투운동이 만든 변화가 오히려 더 편하다고 한다. 수직적 위계에 의한 성범죄가 많았던 만큼 ‘갑질’ ‘꼰대문화’ 등이 덜해졌다는 것.
학기 초 불구 단체 술자리 거의 없어
대학가 분위기를 살피고자 3월 12일과 13일 서울 성동구, 신촌, 홍대 앞 일대를 찾았다. 3월은 개강파티, 신입생 환영회 등 단체 술자리가 가장 많은 시기다. 2~3년 전만 해도 3월 저녁 7~8시 대학가에서는 신입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선배를 따라 학과별로 줄지어 술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두 시간이 흐르고 술 한 잔씩을 마셨는지 주점에서는 큰 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는 신입생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하지만 올해 대학가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대학가 가게들은 여전히 학생으로 차고 새 학기 분위기도 물씬 풍겼다. 하지만 학과 행사 등 대단위 술자리는 보기 어려웠고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인 자리가 대부분이었다.
대학생 윤모(23) 씨는 “2월 전역해 이번 학기에 복학했는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2년 전에는 각 학과 행사 때문에 3월에 술집 찾기가 힘들었지만 요새는 술집에 자리가 많다. 복학 첫 학기라 3월 학과 행사만 찾아다녀도 신입생들과 친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2주 동안 가진 술자리는 비슷한 시기 전역한 학과 동기 3명과 맥주 한 잔 마신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술자리를 갖더라도 사건, 사고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도 커졌다. 신촌 인근 대학가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김모(48·여) 씨는 “3~4년 전만 해도 만취해 술자리에서 구토하거나 싸우는 학생을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봤는데 최근에는 취해서 난동을 피우는 손님이 거의 없다”고 밝혔다.
학과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권모(22) 씨는 “지난해부터 학생회, 동아리 등 학생자치단체 차원에서 음주 관련 문제나 성희롱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에 힘쓰고 있다. 술자리에서 외모 품평이나 선배 가운데 누가 마음에 드느냐는 식의 질문이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조심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학생들에게 외모 칭찬도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고 밝혔다.
밤 10시가 되자 첫 술자리를 마치고 2차를 가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간혹 얼굴이 불콰한 학생들은 보였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이는 거의 없었다. 한두 명이 있다 해도 동기로 보이는 동성 친구들이 부축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선배들 역시 “앞으로도 술자리는 많을 것이다. 지금 자리를 지킨다고 더 친해지는 것도, 일찍 집에 간다고 덜 친해지는 것도 아니다”며 취한 학생에게 귀가를 종용했다.
대학생 임모(25) 씨는 “얼마 전 동아리 행사 뒤풀이에 갔는데 성희롱 예방 지침이라며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지 말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씨는 친구로부터 지난해 일어난 사건에 대해 듣고 이런 지침이 있을 만하다고 수긍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술에 취해 옆자리 여자 후배의 허벅지에 손을 댄 사건이 있었다. 단순히 술에 취해 중심을 잡지 못해 일어난 실수였다면 해프닝으로 그쳤겠지만 그 선배의 손은 10분도 넘게 한 곳에 머물렀다.
학내 미투 분위기 아직 멀었다
지난해 3월 대전 배재대 총학생회 임원들이 ‘술 강요 않는 건전한 대학문화 조성을 위한 다짐대회 및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모습. [뉴스1]
e메일에는 ‘학생 여러분들께는 의도치 않게 성폭력·성희롱의 가해자가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히 활발한 SNS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부적절한 언행으로 인해 돌이키기 어려운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주시길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일부 학생은 “의도치 않게 일어나는 성폭력은 없다”고 반발했다. 서울 지역 대학연합 페미니즘 소모임 ‘보통의 경험’ 한양대 지부는 3월 8일 대자보를 통해 ‘타인을 성적 대상화하여 희롱하고 추행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순한 의도가 가득한 범죄 행위입니다. 설사 가해자가 의도치 않게 성폭력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범죄로 인식하지 않은 채 일상적으로 저지를 수 있었던 사회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라며 e메일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학교 당국은 e메일과 공고문을 통해 사과하고 학생들이 지적한 문장을 수정했다.
대학생 정모(24) 씨는 “미투운동으로 ‘문제가 있다’ 정도의 인식은 캠퍼스에 퍼지고 있지만 사안에 대한 표면적 인식에 머무는 수준인 것 같다. 단순히 ‘성폭력은 범죄다’ 수준을 넘어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 문화를 반성하고 공감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듯하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은 물론, 경기 인근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들은 미투운동 이후 대학가 문화의 변화에 대체로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성차별·성희롱적 발언이 줄어들었다는 것. 대학생 신모(23·여) 씨는 “한 달에 한두 번은 일부 교수님이 강의시간에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최근 들어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교수님들도 최근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조심한다”고 밝혔다. 최근 동아리 회장을 맡은 박모(25) 씨도 “지난해까지만 해도 3월에 신입생 환영회를 찾아주신 동아리 졸업 선배들 가운데 몇 분이 술을 강권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졸업한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회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친한 선배들을 못 보는 것은 아쉽지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수로 닿아도 깜짝 놀라”
미투운동은 일반 기업의 문화도 빠르게 바꾸고 있다. 회사원들이 가장 크게 변했다고 보는 것은 회식문화였다. 대부분 식사만 하고 헤어지거나 술을 마신다 해도 오후 9시 무렵 자리를 마무리한다. 직장생활 5년 차인 유모(33) 씨는 “1~2년 전부터 회식이 크게 줄었다. 간혹 회식을 하더라도 술자리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가볍게 먹고 헤어진다. 사내에서 지침이 내려와 2차도 술을 마시기보다 영화·공연 감상, 스크린 야구 등 문화·여가 활동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서울 마포구에서 요식업체를 운영하는 김모(45) 씨는 “최근 직장인 손님이 많이 줄었다. 원래는 남녀가 함께 술을 마시는 단체손님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연인 말고는 이성이 섞여 있는 단체손님을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그래도 음식점은 (미투운동의) 영향이 크지 않지만 노래방처럼 직장인들이 술을 한잔 걸치고 찾던 곳은 손님이 없어 난리”라고 말했다.
실제로 3월 9일 저녁 마포구 일대 번화가에서는 정장을 입은 직장인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금요일 저녁이라 회식자리가 드물기도 했지만 마음 맞는 회사 동료끼리 모여 술자리를 하는 것도 사라진 것. 직장인 최모(29) 씨는 “미투운동이 확산된 후 남자 직원들이 여성 동료와 술자리 갖는 것을 꺼린다. 심지어 동기 모임도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기업은 몇 년 전부터 성희롱·성범죄에 관한 행동 지침을 마련해왔다. CJ그룹은 계열사에 절주 실천 지침인 ‘절주오행’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술자리를 최소화하고 오해받을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삼성전자는 회식과 관련해 몇 년 전부터 ‘술은 한(1)가지 종류만, 1차에서 9시에 끝내자’는 의미의 119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성희롱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성범죄신고센터를 설치한 기업도 많았다. 이마트는 본사와 사업장에서 연 2회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다. 롯데마트는 성범죄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해 성범죄 사실이 밝혀질 경우 면직 처분한다. 재계 관계자는 “규모가 있는 기업의 경우 임직원의 성추문이 회사 신뢰도에 큰 타격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 몇 년 전부터 성범죄 예방 및 교육에 힘써왔다”고 밝혔다.
이날 밤 10시 넘어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근처 번화가를 찾았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오모(28) 씨는 “1월까지만 해도 연초라 직장인끼리 만남의 자리를 여러 번 가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잘 모이지 않는다. 오늘도 형, 동생 하는 남자 동기들만 모여서 맥주 한잔하고 스크린 야구장에 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남녀갈등보다 문화 변화 계기 돼야
3월 13일 서울 신촌역 인근 번화가 모습. 술에 취해 있는 대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위). 과거 술자리 위주 회식의 한 모습. [동아DB]
일각에서는 미투운동 때문에 남성들이 위축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단순히 폭로만 나와도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이 불이익을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논거가 성범죄에 대한 무죄 및 무혐의 판결 비율이다. 대법원의 ‘2017년 범죄발생검거 및 처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범죄로 기소된 건은 총 2만7248건. 이 중 6806건이 무죄나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25%가량이다. 지난해 형사 범죄로 기소된 사건 전체의 무혐의 비율은 17.8%로 성폭력 범죄에 비해 낮다. 게다가 지난해 경찰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6년 무고죄 3617건 가운데 약 40%가 성범죄 무고였다.
하지만 해당 통계 자료에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성폭력 범죄의 무죄·무혐의 비율이 25%로 다소 높아 보이지만, 강력 범죄만 따졌을 때 전체 기소건 가운데 무죄·무혐의 비율은 23.4%로 성폭력 범죄와 큰 차이가 없다.
일부 남성 직장인은 미투운동 이후 오히려 편해진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직장인 허모(33) 씨는 “확실히 회식이 줄어 좋다. 남성끼리 회식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어 최근 회식을 거의 안 하고 있다. 덕분에 개인 시간이 크게 늘어 이달부터 체육관에 등록해 퇴근 후 운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견기업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는 직장인 홍모(45) 씨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부 관리직의 폭언 등으로 여직원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당연히 팀 내 업무 능률이 떨어지고 직원들의 불만도 컸다. 하지만 언행을 조심하는 문화가 확산되니 일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