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철 기자]
인천 송도에 자리한 VR 테마파크 ‘몬스터VR'은 친구, 연인,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테마파크다. [조영철 기자]
박성준(38·사진) ㈜GPM 대표가 자신 있게 말했다. 2017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연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오전 11시 30분 박 대표와 함께 인천 송도 트리플스트리트 6층에 있는 VR(Virtual Reality·가상현실) 테마파크 ‘몬스터VR’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즐거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평일 오전인데도 적잖은 이가 각종 ‘어트랙션’을 즐기고 있었다. 가장 큰 비명의 진원지는 멀찍이 떨어진 VR 롤러코스터였다. VR 전용 헤드셋을 착용하고 롤러코스터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머리 위로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스릴을 만끽하는 모습이 보였다. VR 영화를 상영하는 미니 극장 등 일부 인기 어트랙션 앞에는 대기자도 있었다.
㈜GPM은 바로 이 공간을 운영하는 회사다. 다섯 달 전 송도에 첫선을 보인 ‘VR 기반 대규모 실내 테마파크’가 기대 이상 호응을 얻으면서 ㈜GPM은 최근 전국 각지의 랜드마크 빌딩과 입점 관련 협의를 진행 중이다.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회사 ‘세빌스코리아’, 방송·통신 전문기업 ‘CJ헬로’, 방대한 숙박 인프라를 갖고 있는 ‘야놀자’ 등과 파트너십 계약을 맺고 사업 분야를 확대하고 있기도 하다.
VR업계의 스타벅스
VR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와 함께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인 중 하나로 꼽히는 첨단기술이다. 또한, 게임, 교육, 영화, 공연, 스포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장이 급성장 중인, 촉망받는 산업 아이템이기도 하다. 박 대표는 ㈜GPM을 통해 바로 이 분야를 선도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VR 사업이 성공하려면 기술력과 콘텐츠 개발력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하죠. 게임개발회사에서 출발한 ㈜GPM은 양쪽 모두에 강점이 있어요. ‘VR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목표도 분명하고요. 저는 이것이 다른 업체와 차별화되는 우리 회사만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저렴하고 맛있는 커피를 파는 가게는 꽤 있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스타벅스’를 찾죠. 다른 데서는 흉내 낼 수 없는 가치, 서비스, 경험 등을 제공하는 기업이 살아남는 겁니다. 그런 회사가 되겠다는 ㈜GPM의 꿈이 몬스터VR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리라고 믿습니다.”
갑작스러운 사업 확장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 대표가 한 말이다. 그는 “몬스터VR이 개장한 건 다섯 달 전이지만 ㈜GPM이라는 회사는 2010년 문을 열었다. 나는 그보다 앞서 ‘GPM스튜디오’라는 이름의 게임개발업체를 설립, 경영한 적이 있고 2000년부터 ‘GPM커뮤니티’(현 데브코리아)라는 게임 개발자 커뮤니티도 운영하고 있다.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가 집약된 것이 몬스터VR”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이제 갓 30대 후반이다. 그런데 벌써 20년 가까이 게임업계에 몸담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그는 씩 웃으며 “고등학생 때 학교에 거의 안 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게임에 푹 빠져 지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전국 단위 게임 대회에서 1등을 했을 만큼 잘하기도 했고요. 공부는 전교 꼴찌를 도맡아 했지만 싸움을 하거나 사고를 치지는 않아서 학교 선생님들이 딱히 신경 쓸 일이 없었습니다. ‘공부는 안 하지만 뭐 하나 잘하는 건 있는 애’ 정도로 여긴 거 같아요. 시험 기간에는 나와봤자 반 평균만 깎아 먹어서 그런지 ‘너는 학교에 안 와도 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죠.”
그래서 박 대표에겐 딱히 ‘학창 시절’이랄 게 없었다고 한다. 그는 중고교 시절 원하는 만큼 게임을 했다. 여러 차례 큰 상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직접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워낙 일찍부터 컴퓨터와 ‘놀았던’ 터라 관련 기술에도 해박했다. 기술적 구현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스토리를 짜고, 색연필로 하나둘 캐릭터를 그려나갔다. 처음엔 그냥 ‘놀이’였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PC통신 게시판에서 ‘게임 기획자를 모집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동안 ‘기획서’인지도 모르고 만들어온 산더미 같은 게임 기획서를 바탕으로 ‘내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열여덟 살 때 게임회사에 취업했어요. 아직 고등학생이었지만 선생님에게 ‘취업했다’고 하니 ‘잘 다녀라. 졸업은 시켜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매일 아침 교복 입고 학교 대신 서울 낙원상가 쪽에 있는 한 원룸으로 출근했죠. 말이 회사지, 아무런 체계도 없는 곳이었어요. 근로계약 없이 ‘게임이 완성되면 500만 원을 주겠다’는 약속만 받은 상태였죠. 그때는 ‘500만 원’이 정말 큰돈이잖아요.(웃음) 그것만 바라보면서 매일 라면 끓이고, 각종 뒷수발하고, 형들이 ‘판타지에 대한 자료 좀 찾아봐’ 하면 열심히 자료 찾으며 그렇게 지냈어요. 그런데 그 회사에서 개발하던 게임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고, 저는 돈 한 푼 못 받은 채 나오게 됐죠.”
롤러코스터 인생
인천 송도의 대규모 VR 테마파크 ‘몬스터VR'에서 다양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조영철 기자]
데브코리아는 박 대표가 본격적으로 사업체 설립의 꿈을 키워가는 교두보 구실도 했다. “지금처럼 해서는 내가 원하는 게임을 도저히 만들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가 데브코리아에서 만난 인연들을 바탕으로 투자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20대 초반인 나이니 거칠 게 없었다. 박 대표는 “어디서 돈 좀 있고 게임에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무작정 찾아갔다. 유흥주점 방 안에서 ‘여사님’들을 상대로 사업설명회를 한 적도 있다. 틈날 때마다 게임 아이디어를 짜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고,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고 했다. 그에게 무슨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물었다.
“다단계, 배달, 커피숍, 호프집, 고구마 장사….(웃음)”
업종 이름을 끝없이 대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며 웃었다. 알고 보니 박 대표는 그사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먹고사는 게 절박했다. 그렇게 삶이 벼랑 끝을 향해가고 있을 때 마침내 투자자가 나타났다. 그의 게임 아이디어를 높게 평가한 '회장님'은 거액을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박 대표는 일약 게임업계 스타가 됐다. 혜성같이 나타난 젊은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뜨거웠다.
그러나 젊은 CEO로서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고, 결국 ‘절대 마르지 않을 것 같던’ 돈이 다 떨어졌다. GPM스튜디오는 2009년 폐업했다. 빚더미에 앉은 박 대표는 아내, 아들과 함께 한동안 물도, 전기도 끊긴 집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GPM스튜디오 직원 가운데 7명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창업 당시 모두가 간절히 원하던 꿈, ‘좋은 게임을 만드는 일’을 다시 한번 해보자며 버틴 것이다. 박 대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고도 그는 아직 20대였던 것이다.
박 대표는 중·장년층 대상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 강사로 일하며 하루 5만~10만 원씩 버는 돈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매일 아침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이번엔 절대 허투루 날리지 않겠다’고 기도했고,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의 몰락을 지켜본 ‘회장님’도 ‘성공해 꼭 갚으라’며 오히려 박 대표를 격려했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던 그때 ‘유니티 엔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경쟁력이 높아 보이는 게임개발 도구였다. 박 대표는 “컴퓨터로 그림 작업을 할 때 ‘포토샵’ 프로그램을 사용하듯, 게임개발자들도 널리 쓰는 개발 툴이 있다. 유니티 엔진은 당시 우리나라 개발자들에게 생소한 도구였는데 성능이 꽤 괜찮았다. 이것을 한국에 들여오면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뛰었다. 간신히 비행기 표 값을 마련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유니티 엔진 개발사로 날아갔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조영철 기자]
처음엔 자본금이 100만 원에 불과했지만 회사는 금세 성장했다. 유니티 엔진 한 개를 팔 때마다 판매금의 25%가 착착 들어와 쌓였다. 그 돈으로 개발한 게임 ‘좀비 헌터’가 2013년 중국 최대 게임업체 텐센트가 운영하는 QQ라는 게임 플랫폼과 독점 퍼블리싱 계약을 맺으면서 박 대표는 또 한 번 게임업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텐센트가 운영하는 QQ라는 게임 플랫폼과 독점 퍼블리싱 계약을 맺은 해외 게임업체는 ㈜GPM이 처음이라 관련 보도가 이어졌고, 곳곳에서 투자 제의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그런데 잠깐, 박 대표는 ‘전교 꼴찌’였다고 하지 않았나. 학창 시절 한 번도 공부를 한 적 없다는 그가 어떻게 미국, 중국을 넘나들며 사업권을 따고 계약을 체결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남들이 공부할 때 나는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갓 스무 살 무렵부터 틈날 때마다 사업 프레젠테이션을 한 덕에 이제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상대한테 신뢰를 줄 수 있는지 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막무가내로 들이댔다”고 했다.
“제가 미국 가서 한 말이 별거 없어요. ‘코리아 익스클루시브 세일즈, 오케이?’ 이 발음으로 진짜 딱 이렇게 말했습니다. 옆에서 통역하시는 분이 자세한 얘기를 더 하긴 했지만, 저와 유니티 엔진 개발사 대표는 이런 영어로도 충분히 뜻이 통했어요. 저는 외국인이든, 우리나라 대기업 CEO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심을 갖고 대하면 내 마음이 전달될 거라는 믿음이 있죠. 게다가 그때는 당장 굶어 죽을 상황이었는데, 뭐든 못했겠습니까.(웃음)”
그에게 2000년부터 계속 회사 이름으로 쓰고 있는 GPM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는 “Game Professional Members, Game Project Master 등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지금은 Game Play Mate라는 뜻으로 쓴다. 그동안 운영해온 커뮤니티나 업체 성격에 따라 영어 단어는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변함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꿈이 담겨 있다”고 했다.
누구나, 함께, 쉽게
[조영철 기자]
박 대표가 VR의 길에 접어들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떠들썩하게 시작된 중국 게임 론칭이 끝내 무산된 것이다. 그는 “텐센트의 손을 잡고도 중국 내 사업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텐센트와 사상 최초로 계약한 게임업체’라는 이름값 덕에 ㈜GPM에 여러 기회가 찾아왔고, 박 대표가 선택한 것이 VR다. 최신 기술과 콘텐츠를 결합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데 VR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VR는 개인 모바일 장비, 가정 내 개인용 컴퓨터(PC)뿐 아니라 몬스터VR 같은 실내 테마파크를 통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과거 많은 게임이 ‘개인의 오락거리’였던 반면, VR 테마파크는 게임을 ‘공동의 오락거리’로 변화시킨다.
그는 “㈜GPM이 VR 쪽에 사업을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정한 열쇳말이 ‘누구나, 함께, 쉽게’ 세 가지였다. ‘누구나’에는 게임 이용자뿐 아니라 개발자도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는 몬스터VR 같은 오프라인 테마파크와 온라인 플랫폼을 함께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VR 플랫폼은 VR 개발사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공 받아 이용자들이 여러 환경에서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선보이는 장치다. 몬스터VR 같은 테마파크를 비롯해 숙박시설, 리조트, PC방, VR방, 가정 등에 이 플랫폼을 설치하면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VR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GPM은 플랫폼 사용량을 분석해 콘텐츠 개발업체에 수익을 분배한다. 박 대표에 따르면 VR 기술이 확산하면서 세계 각국에 VR 게임 개발사가 생겨나고 있지만, 세계적 B2B VR 유통 플랫폼은 아직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만들어진 ㈜GPM의 VR 플랫폼이 테마파크 몬스터VR 못잖게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 대표는 “어떤 산업이든 시장을 주도하는 건 플랫폼 사업자다. 아직 VR 분야에는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플랫폼이 없기 때문에 우리 플랫폼이 경쟁력을 갖고 확산되면 에어비앤비나 우버 같은 세계 1위 플랫폼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본다”고 자신했다.
업계에서는 세계 VR 산업이 2020년이면 연간 3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본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도 앞다퉈 VR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그 공간에서 ㈜GPM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경쟁력을 겸비한 1등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격동의 20대’를 지내고 ‘이제는 돌아와 VR 앞에 선’ 박 대표에게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