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왼쪽)이 11월 22일 밤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바레인 강연을 마치고 11월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뉴시스]
김 전 장관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친정부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국군사이버사령부(사이버사령부) 산하 530심리전단의 댓글 공작 활동을 지휘하며 연제욱 전 사이버사령관 등에게 정부 및 여권을 지지하는 사이버 활동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번 구속적부심 석방은 검찰이 진행 중인 ‘적폐청산’ 수사 이후 처음이다. 당황한 검찰은 김 전 장관의 석방이 결정되고 1시간 40분 만에 입장자료를 냈다.
‘법원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김 전 장관은 군 사이버 활동 결과를 보고받고 지시한 사실, 2012년 선거에 대비해 친정부 성향 군무원을 확충하고 4월 총선 관여 활동에 대해 보고받고 지시한 사실 등을 시인하고 있다. 관련자들도 보고하고 지시받은 사실을 진술하는 등 김 전 장관의 혐의 소명은 충분하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이 풀려나자 공범으로 함께 구속된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도 1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에 구속적부심을 신청했다.
“김정은이 두려워하는 김관진”
일부 언론은 김 전 장관이 이명박(MB) 전 대통령에게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 활동을 보고한 사실을 시인했다고 보도하면서 조만간 이 전 대통령을 소환조사하지 않겠느냐는 기사를 썼다. 수사는 김 전 장관을 넘어 사이버사령부 직원 증원에 연루된 김태효 당시 대통령실 대외전략기획관과 최고 윗선인 이 전 대통령으로 뻗어가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의 석방으로 당장 이 전 대통령 소환조사는 어렵지 않겠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앞서 김 전 장관이 구속된 바로 다음 날인 11월 12일 이 전 대통령은 바레인으로 출국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내놓았다.
“지난 6개월의 ‘적폐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이 과연 감정풀이인가, 정치보복인가 이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중략) 부정적인 것을 고치기 위해 긍정적인 것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이어 측근 입을 빌려 노무현 정부 관련 자료공개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이제 6개월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이 전 대통령에 대해 더 많이 알겠느냐, 5년 동안 정권 잡았던 우리 쪽이 노무현 정부에 대해 더 많이 알겠느냐. (중략)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겠지만 검찰이 무리수를 두면 꺼낼 수밖에 없다.”
이 전 대통령이 적폐청산 수사를 “정치보복 아닌가”라고 운을 떼자 보수층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노무현 정부 관련 자료공개 카드가 나온 지 일주일 만에 김 전 장관이 풀려났다. 이 전 대통령 소환조사에 필수적인 징검다리 하나가 빠진 것이다.
김 전 장관은 북한이 그의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채 총검술 훈련을 하고 암살단을 보낸다고 협박했을 정도로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꼽힌다. 보수층 사이에서는 그를 구속한 것은 결국 북한이 가장 좋아할 일을 현 정부가 한 것이라는 반발이 번져나갔다.
자유한국당(한국당) 정태옥 원내대변인은 11월 23일 “참 충신 원숭환(袁崇煥)을 처형하고 명나라가 망했는데, 참 군인 김관진을 구속하고 대한민국이 멀쩡하길 바라는가”라며 현 정부의 수사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김 전 장관은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참 군인”이라며 “사이버사령부를 대폭 강화한 것은 당시 북한이 전자전 병사 3만 명을 육성하고 디도스(DDoS) 해킹으로 전 세계를 공격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짓고 검찰이 ‘하명(下命)수사’에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당 정치보복대책위원회까지 만들었다. 적폐청산 수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넘어 이 전 대통령에게까지 이르자 한국당은 비판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김 전 장관의 석방으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흩어진 보수세력이 재결집에 나서는 형국이 됐다. ‘정치보복’을 주장하는 한국당의 보수대통합론이 힘을 받으면서 바른정당과 통합에도 성과를 냈다. 바른정당 통합파 9명이 11월 9일 한국당으로 복당하면서 한국당 의석수는 116석이 됐다. 국회의원 6명이 복당하면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한다.
암묵적인 보수대단결 흐름
정치적으로 보수대통합은 ‘친박(친박근혜)계+친이(친이명박)계’다. 18대 대선에서 갈라지기 전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적폐청산 수사가 이 전 대통령을 향하면서 친이계도 급속히 단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이 전 대통령이 10월 말부터 늘푸른한국당 이재오 대표와 바른정당 정병국 의원, 조해진 전 의원을 차례로 만나 한국당 복당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장관의 석방은 정관계 전체의 암묵적인 보수대단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개연성이 높다.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11월 23일 김 전 장관의 석방 결정을 내린 신광렬 수석부장판사가 우병우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과 동향이고 같은 대학 출신인 데다 연수원 동기라며 ‘신상’을 털었지만, 그런 이유로 신 판사가 김 전 장관의 석방을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 전 수석이 굳이 이 전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11일 전에 영장전담 판사가 발부한 구속영장 내용을 정면으로 번복했다는 점에서 검찰은 적잖이 당황했다.
김 전 장관의 석방에 석연치 않은 점이 없지는 않다. 결정적 대목은 검찰이 김 전 장관의 구속영장에 이 전 대통령을 공범으로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김 전 장관이 관여한 부분은 댓글 공작 활동 전체가 아닌 일부다. ‘몸통’에 해당하는 부분은 국가정보원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전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려면 국가정보원 댓글 공작 활동과 관련한 지시 및 보고 관련 증거가 필요하다. 따라서 공범 적시 여부를 뒤로 미룬 채 추가 증거 수집에 집중한 게 결과적으로 김 전 장관 석방의 판단 근거가 된 측면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칫 하다가는 원내 1당 자리를 내줄 수 있고, 가뜩이나 협치(協治)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여당으로선 국정운영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여기에 최근 정부 여당 처지에서 악재가 하나 더 불거졌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을 넘어 한국당을 포함한 ‘3당 합당’을 추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당 내 호남 출신 중진의원들의 반발로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고려해 일각에선 김 전 장관을 석방하면서 청와대가 속도 조절에 나선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