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세워져 있는 박정희 동상.[박해윤 기자]
왜 사람들은 그를 ‘좋거나 나쁜’ 혹은 ‘훌륭하거나 형편없는’ 인물로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보일까. 사실 이분법적 사고는 유아기에 나타난다. 세상과 처음 마주한 갓난아기는 생존본능에 충실하다. 그렇기에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자기를 ‘보살펴주는’ 자와 ‘해치려는’ 자,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다.
모든 아이가 엄마를 보면 방긋 웃으며 달려가 안기려 하는 반면, 낯선 어른을 보면 이내 경계하고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박정희도 똑같다. 나를 잘살게 해준 사람이 박정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흐뭇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는 혐오와 두려움을 느낀다.
어린 시절 각자 겪은 경험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온 가족이 TV를 보면서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 비난이나 혐오의 말을 쏟아냈다면? 비록 어린 나이라도 그 시절 ‘나는’ 박정희를 부정적인 모습으로 연상했을 것이다. 반면 가정에서 늘 “우리가 이만큼 잘살게 된 건 다 박정희 덕분이야”라는 긍정적인 말을 듣고 자랐다면 결과는 정반대일 테다. 박정희는 언제나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누군가를 안아주는 마음씨 착한 아저씨, 선물 보따리를 잔뜩 들고 있는 산타클로스 정도로 생각됐을 게 분명하다.
극단적 이상화와 폄훼는 유아적 사고방식
물론 어린 시절 집안 분위기와 무관하게 박정희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이들도 있다. 이는 당시 어린 ‘나의’ 생각과 상상이 무의식적으로 이미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입학한 후 다양한 책을 읽고 신문과 TV를 통해 박정희라는 인물을 조금씩 접하면서 어린 시절 집안에서 들었던 얘기와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그때부터는 나만의 의식세계에서 박정희를 재구성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 각인된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반대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가끔 지인들과 박정희에 대한 의견을 가볍게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사실과 논리적 근거를 더욱 열심히 외우고 공부한다. 반면 자신의 논리에 반하는 사실은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현실 혹은 진실 왜곡은 이렇게 이뤄진다.
2500년 전 활동한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주장을 잠시 생각해보자. 그는 ‘동굴의 비유’ 또는 ‘동굴 우상’을 설파했다. 사슬에 묶인 인간들은 동굴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들을 실체라고 착각한다.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철학자)가 동굴로 돌아와 이데아의 모습을 전하며 사람들을 각성케 한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동굴 속 사람들은 선각자의 말을 따르기는커녕 그를 죽여버린다.
2500년 전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 여전히 우리는 왜곡된 현실을 진리라고 믿기도 한다. 무의식과 의식이 일치할 때 그 힘은 매우 강력해진다. 이는 결과적으로 과대한 ‘이상화(idealization)’ 혹은 극단적 ‘폄하(devaluation)’를 만들어낸다. 박정희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언행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정치적 행동까지 보이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무의식과 의식의 방향성이 서로 다르다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박정희를 지지(또는 반대)하는 말을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편함이 밀려온다. 그러다 은연중에 반대자(또는 지지자)의 얘기에 공감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무의식은 의식을 지배한다. 즉 아무리 의식으로 무의식을 억압하려 애써도 언젠가는 본심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혹,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소극적 지지자(또는 반대자)로 비치게 된다.
한편 인간은 자아가 점차 성숙해가면서 자신의 관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점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세상을 좀 더 폭넓게 바라보면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른바 ‘통합(integration)’이다.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의 관점과 매우 다름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의아하고 놀랍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차근차근 듣다 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이때 우리는 ‘정반합(正反合)’ 과정을 밟게 된다. 이는 독일 철학자 헤겔이 주창한 변증법적 논리의 3단계다. 즉 하나의 주장인 정(正)과 그에 모순되는 다른 주장인 반(反)이 결국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에 통합되는 과정이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룬 훌륭한 지도자라는 주장이 정(正)이라면, 인권을 탄압하고 독재정치를 펼친 나쁜 정치인이라는 주장이 반(反)이 될 수 있고, 결국 ‘박정희는 경제를 발전시킨 훌륭한 지도자이지만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라는 합(合)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반대 과정도 성립된다. ‘박정희는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독재자이지만(正), 그래도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이룬 지도자(反)라고 볼 수 있다(合)’도 성립된다는 얘기다.
이는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를 통합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부모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을 때면 부모는 ‘좋은 사람’이, 반대로 야단을 맞을 때면 ‘나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던 부모가 결국 동일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즉 부모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상호 모순적이고 대립적이어도 어쩔 수 없이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박정희에 대한 트라우마 지우기 힘들어
더 나아가 이는 대인관계에도 적용된다. 친한 친구나 연인이 비록 좋은 사람이지만 때로는 나쁜 사람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또는 그녀를 두 존재(또는 개체)로 바라보지 않고 통합된 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는 ‘그래도 좋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만일 최종적으로 ‘그래서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나는 그 또는 그녀를 더는 나의 친구나 연인으로 여기지 않고 결별할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인식이 ‘그래도 좋은 정치인’인지, ‘그래서 나쁜 정치인’인지에 따라 그를 받아들이거나 결별하게 될 것이다.단, 예외적인 상황이 있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 즉 가족이나 중요한 주변 인물이 박 전 대통령 시절 고문이나 정치적 핍박을 받았다면 나는 그의 트라우마(trauma·심리적 외상)를 공유하게 돼 박정희를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반대로 나 혹은 나와 긴밀한 관계인 사람이 사회적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면, 나는 박정희로부터 혜택을 입은 셈이므로 좋아할 수밖에 없다. 결국 박정희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나와의 직접적인 이해득실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아(ego)의 관점’이다. 우리는 매 순간 ‘이드(id·본능)’를 느끼고 ‘초자아(superego)’가 감시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현실을 판단하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주체는 바로 자아다. 박정희를 좋게 혹은 나쁘게 평가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는 ‘유아기적 고착’과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주의적 자아’의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