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사진)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개연성이 높다 보고 조사 중이라고 했다. 고인은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시 6편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이어 28세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로 임용되며 천재 소리를 들었다.
1989년 1월 출간한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4월에 나온 시집 ‘가자, 장미 여관으로’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펴내고 이듬해 음란물 제작 혐의로 구속되면서 예술과 외설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문화예술인이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최종 결과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필화 사건으로 해직된 고인은 복직과 휴직을 반복하다 지난해 8월 정년퇴임했다.
고인은 지인들에게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사회가 자신을 죽였다고도 표현했다. 특히 1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는 “나는 실패한 인생이다. 몹시 우울하고 외롭다. 겉으로는 근엄한 척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우리 사회의 행태에 한 번 시비를 걸어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라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밝혔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사면 복권됐지만 ‘즐거운 사라’는 지금도 출판 금지 상태라고 한다.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문인이 사회적 시선에 의해 처벌받고 급기야 인생 전체가 황폐해진 슬픈 사연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필자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첫 번째는 ‘개인은 무척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는 순간 많은 사람이 그를 적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존 문학적 표현과는 판이한 성적 묘사나 파격적인 상상에 많은 사람이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면서 열광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그를 사회적으로 손봐야 할 ‘악(惡)’으로 간주했다.
그는 강의 중에 긴급 체포돼 구속 수감됐다. 체포되는 순간 그는 “이것은 10년 후에 코미디가 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표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자긍심을 갖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3년간 재판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지쳤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문화예술인들의 구명운동이 있었고 공권력 남용 비판이 이어졌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유죄’였다.
사회적 시선의 벽을 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회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개인은 한없이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작을 업으로 하는 대학교수 겸 문인의 소중한 삶이 부정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의 자아존중감은 날개 없이 추락했을 테다. 이때부터 우울증이 서서히 발병했을 개연성이 높다.
우울증의 주된 심리사회적 원인은 ‘상실(loss)’이다. 창작가로서 명예(honor)의 상실, 대학교수로서 지위(position)의 상실, 유명인으로서 인기(popularity)의 상실, 그리고 예전 삶의 방식으로서 일상(daily life)의 상실 등이 그를 괴롭혔다. 그가 복직한 후 대학 당국이나 동료 교수들로부터 배척받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는 동료 교수들과 동질감 또는 집단의식으로서 안전(security)의 상실에 의해 더욱 심화된 우울증상을 겪었을 것이다.
필자가 두 번째로 한 생각은 ‘우울증을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우울증을 고백했고, 약도 복용 중이라고 했으며, 별세 전에는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권유할 만큼 증세가 많이 악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울증이라는 병마를 이기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만일 사인이 자살이 확실하다면 우울증의 부정적 영향은 더욱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그의 고교 동창들은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적 죽임이 그를 우울증에 이르게 했고, 그것 때문에 그가 자살을 선택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실체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사회적 시선이 마광수라는 한 명의 나약한 개인을 우울증에 이르게 했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갔다. 그러나 사회적 검열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자기 검열로 상상력이 무뎌졌고, 시대 상황의 변화와 오랜 투병 생활 등 여러 원인에 의해 더는 예전의 화려하고 주목받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필자는 그의 창작 노력을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자 자가 치료로 간주한다. 비록 확인할 길은 없겠지만, 그가 과연 적극적으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하고 꾸준히 약물치료를 받았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울증을 제때 치료했다면, 그래서 우울증에서 벗어났다면 예전에 버금가는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과거의 아픈 상처를 봉합하고 새살이 돋게 해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개인의 의료기록은 비밀이지만 그가 충실하게 우울증 치료를 받았음에도 낫지 않았다면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임에 틀림없다. 정신건강의학계가 더욱 분발해야 하고, 더 좋은 우울증 약물이나 치료법 개발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사회적 불안은 파괴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과거에 그를 단죄한 사람들은 불안과 걱정을 안고 있었다. 마광수라는 사람에 의해 성적 자유에 빠지는 젊은이가 많아지지 않을까, 혼전 순결을 지키기는커녕 즐거운 사라처럼 성을 즐기는 여성이 늘어나지 않을까, 심지어 사회가 성적으로 타락해 에이즈가 창궐하지 않을까 같은 염려들이었다. 과연 그의 소설이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왔는가. 성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소설가 마광수 씨의 ‘즐거운 사라’를 읽고 성 범죄를 꿈꾸다 마침내 실행했다”고 자백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다. 하지만 ‘누군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그의 책을 시장에서 회수해 판매 금지시키고, 구속 수감과 징역이라는 물리적 형벌을 가해 추가 생산을 막은 것이다.
고인의 시신과 유서가 발견된 날, 그의 이름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수많은 애도의 댓글이 달렸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람’이라는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그런 상황을 그가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다면, 그의 우울증은 나을 수 있을까. 그의 표현대로 사라 때문에 망친 인생, 그래서 원망스러운 우리 사회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가 어느 정도 해소될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