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4

2003.03.06

여행업·태권도로 일군 ‘마카오 신화’

2대째 여행사 운영하는 터줏대감 석청영씨, 22년간 경찰교관으로 명성 쌓은 이동섭씨

  • 우길/ 여행작가 wgil2000@dreamwiz.com

    입력2003-02-27 14: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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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업·태권도로 일군 ‘마카오 신화’

    1963년 마카오로 이주한 아버지 석재만씨의 뒤를 이어 여행업을 하고 있는 석청영씨. 마카오 치안경찰국 기동부대 총교관인 이동섭씨.(위 부터)

    1963년 2월, 대만을 출발한 40대 한국인 부부가 마카오에 상륙했다. 이들은 25년 동안 마카오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여행사를 운영했다. 관광객을 확보하기 위해 홍콩 주재 한국영사관을 끊임없이 노크했고, 드디어 1989년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자 제일 먼저 한국인 가이드들을 모아 마카오 정착에 필요한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마카오 여행 전성기에는 한국인 가이드 수만 20명에 달했다. 이 부부가 요구한 취업조건은 단 하나, 가족과 함께 오는 것이었다. 남자 혼자 지내다 도박에 빠져드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TV가 생산되기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마카오로 수입한 것도 이 부부였다.

    마카오에 정착한 최초의 한국인 석재만씨. 신의주에서 태어나 일본 나고야에서 교육을 받은 석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만에서 일본군 전투기 편대장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고향은 공산주의 체제가 되어 내키지 않았고 일가친척 한 명 없는 남한도 마땅치 않았다. 그는 대만에 눌러앉았다. 대만 카오슝 한인회 회장을 지내며 한국어학교를 세우는 등 교포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다. 석씨 가족은 모두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심지어 대만인 며느리까지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할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

    중국 본토 여행상품 개발 ‘대성공’

    그러나 마카오에 정착한 뒤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신상옥·최은희 납치사건’으로 유명한 조광무역(마카오 북한대표부 기능을 가진 회사)의 북한 공작원들이 “아이들을 김일성대학에 보내주겠다” “50만 달러를 주겠다”며 북한 이주를 강권했다. 사실 머리에 총을 겨누며 북한에 가든지, 마카오에서 죽든지 양자택일하라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북한 공작원들도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며 버티는 석씨를 어찌할 수 없었다.

    98년 한국의 IMF 금융위기가 마카오에까지 밀어닥쳤다. 한국 관광객을 마카오로 보내던 홍콩의 한국여행사가 10억원의 부도를 낸 후 잠적하자 석씨의 사업도 그대로 주저앉았고, 시름시름 앓던 석씨는 아들의 손을 쥔 채 눈을 감았다.



    석재만씨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못했던 아들은 석씨의 2남1녀 중 막내인 석청영씨(49). 그는 대만 중문대학에서 관광과를 전공하고 1983년부터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아버지는 한국땅을 못내 그리워했지만 그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만으로 눈을 돌렸다. 대만에서는 중국 본토로 직접 갈 수 없기 때문에 홍콩을 경유해야 했다. 그러나 마카오에 비행장이 건설되고 9대의 비행기를 보유한 ‘에어 마카오’가 생기자 석씨는 곧 ‘대만-마카오-중국’ 여행상품을 개발했다. 매년 300만명의 대만인이 중국 본토로 들어가기 위해 홍콩이나 마카오를 경유하는데 그중 15만명 정도가 마카오를 선택한다고 한다. 이들을 겨냥한 석씨의 여행상품은 대성공이었다.

    또 중국의 시난 항공과 샤먼 항공 비행기를 전세내 마카오에서 중국의 충칭, 청두, 쿤밍, 항저우, 샤먼, 푸저우 등 6개 도시로 매주 30편씩 띄우고 있다. 140명이 탑승하는 737기 한 대를 빌리는 비용이 18만 홍콩달러(약 2400만원)라고 하니 석씨의 사업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에 오토바이 공장을 짓기 위한 사업도 구상중이다.

    여행업·태권도로 일군 ‘마카오 신화’

    포르투갈과 중국의 문화가 혼재하는 마카오 거리(왼쪽). 마카오의 상징인 성바오로 성당. 현재 한쪽 벽면만 남아 있다(가운데). 마카오의 청소년들. 마카오에는 대학이 3개밖에 없어 중국, 대만, 캐나다 등지로 유학 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마카오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으로 꼽히는 석씨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인이 된다. “꼭 한국에 가서 살아라”는 유언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서울을 드나들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았다. 마침 한 회사와 동업을 시작했으나 석씨 역시 아버지처럼 큰돈을 떼이고 말았다. 사람만 믿고 외상거래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떼인 돈을 받으러 쫓아다니느니 그 시간에 더 열심히 일하는 게 낫겠더라구요.” 그는 이렇게 털어버리고 한국행을 포기했다.

    카지노로 먹고 사는 도시 마카오에서는 카지노 하다 가진 돈을 다 날린 후 석씨의 여행사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들은 “일단 비행기표를 끊어주면 서울에 돌아가서 꼭 송금하겠다”고 다짐하며 “같은 한국인이니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며 애원하곤 한다. 그때마다 “외국땅에서 고생하며 사는 동포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이 떠올라 두말없이 표를 사주었다. 하지만 표를 건넨 횟수는 50여 차례 되지만 송금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떤 이는 다시 마카오에 와서 카지노를 하다 마주쳤는데 그냥 외면했다.

    “경찰 퇴직 후엔 한국 가 살아야죠”

    “아버님이 그랬듯, 저는 갈 곳도 볼 것도 없는 마카오에서 단 한 번도 카지노 게임을 한 적이 없어요.” 한오(韓澳)유한공사 대표 석청영 사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년 동안 여행업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는 느긋하게 카지노를 즐기거나 관광을 해본 적이 없다. 아내와 외아들과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석재만씨가 세상을 떠난 뒤 석청영씨와 함께 마카오의 터줏대감 자리를 물려받은 이가 이동섭씨(48)다. 그는 태권도 7단으로 마카오 치안경찰국 특경총부 기동부대 총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1980년 8월 홍콩에서 열린 태권도 대회 참가를 계기로 마카오 경찰 훈련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처음에는 견문도 넓히고 중국어도 배우려고 무보수로 일했으나 치안경찰국장에 의해 특별 채용됐다.

    “지금은 고층건물도 생기고 거리도 깨끗하지만 80년대에는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이 5층짜리 3개밖에 없었어요. 거리는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였죠. 이런 데서 어떻게 살까 싶었는데 벌써 22년이 흘러 딸 둘이 대학생이 됐습니다.”

    99년 10월 마카오가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까지 카지노의 이권을 둘러싸고 마카오 조폭들 간의 싸움이 잦아 치안이 불안했지만 지금은 말끔히 해결됐다. 가톨릭 국가로 사형제도가 없는 포르투갈법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자는 인민재판에 회부한다’는 중국법(여기서 인민재판은 곧 사형을 뜻한다)으로 바뀌면서 조폭들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이동섭씨는 토·일요일에 당번 설 때를 제외하곤 주5일간 근무하는 경찰 공무원 생활이 마음에 들고 월급도 만족스럽다고 한다. “돈은 무슨 돈. 마음 편히 먹고 살고 마음껏 골프 치며 딸 둘 대학에 보냈으면 됐죠”라며 웃는 이씨. 그래도 57세에 정년퇴직하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마카오에는 도박장이 없어요. 마카오에서는 오락장이라고 하거든요. 마카오법에도 특수한 오락사업으로 명시돼 있습니다. 마카오인들은 오락장에서 도박을 하지 않아요. ‘잃어도 그만, 따도 그만’인 돈으로 느긋하게 즐기죠. 그런데 유독 한국인만 죽기살기로 매달려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동섭씨의 말대로 마카오엔 도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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