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8

2005.03.29

뮤지컬 열풍 8할은 ‘열혈 팬의 힘’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5-03-24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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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열풍 8할은 ‘열혈 팬의 힘’

    ‘오페라의 유령’ 팬클럽 회원들이 배우들에게 빨간 장미를 건네주고 있다.

    “상하이 순회공연을 마치고 지금 막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팬텀’ 브래드 리틀 씨입니다~.”

    3월14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사회자의 고색창연한 멘트가 울려퍼지고 마침내 브래드 리틀이 모습을 드러내자 200석 규모의 작은 극장 안은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찼다. 수백개의 디카와 폰카가 일제히 불을 밝히며 이 ‘스타’의 한국행을 환영했다.

    브래드 리틀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 역만 1800회 이상 맡아온 뮤지컬계의 대스타. 풍부한 성량과 준수한 외모, 빼어난 연기력을 고루 갖춰 ‘사상 최고의 유령’이라는 평가를 받는 배우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터. 그에게 이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의문은 이날 행사의 내용을 알고 나면 금세 풀린다. 공연이 없는 월요일, 자유소극장에 특별히 마련된 이 자리는 오직 ‘오페라의 유령’ 팬만을 위한 ‘팬미팅’이기 때문이다.

    2001년 LG아트센터에서 장기 공연되며 24만명의 관객을 동원, 우리나라에 뮤지컬 붐을 일으킨 ‘오페라의 유령’은 열혈 마니아가 많기로 유명한 작품. 당시 이 뮤지컬의 매력에 빠진 팬들은 올 6월 이 작품이 다시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초부터 온라인 동호회를 결성하고 작품을 공부하며 공연을 기다려 왔다. 이날 자리는 이들의 ‘열성’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던 셈이다.



    해외 뮤지션들이 공식 기자회견이나 방송 프로그램 출연에 앞서 팬미팅을 하고 첫인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 배우들과 함께 내한한 ‘오페라의 유령’ 제작사 ‘RUC’의 팀 맥팔레인 대표가 “온라인 팬클럽 회원만을 초청해 배우와 만나게 하는 이런 자리는 인터넷이 발달한 한국에서만 가능한 독특한(Unique) 행사”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하지만 배우들은 이날 오직 200명의 ‘무료’ 관객만을 위해 뮤지컬 넘버를 부르고, ‘비공식 회견’을 여는 등 꽉 짜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에 대해 ‘팬텀 프리뷰 나이트’ 행사를 기획한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는 “한국 뮤지컬 공연의 성패는 마니아층의 초반 반응이 좌우한다는 사실을 배우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팬들의 평가와 입소문이 ‘오페라의 유령’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뮤지컬 열풍 8할은 ‘열혈 팬의 힘’
    해마다 10~15% 성장을 거듭하며 무섭게 커지고 있는 한국의 뮤지컬 시장. 한 해 관객만 50만명에 육박하는 이 흐름을 움직이는 것이 마니아들의 입소문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뮤지컬 기획사들은 하나같이 ‘한국 뮤지컬의 발전을 이끌고 있는 힘의 8할은 열혈 마니아에게서 나온다’는 말에 동의한다.

    프리챌의 ‘송 앤 댄스’, 다음의 ‘웰컴 투 브로드웨이’·‘뮤지컬 매니아’, 싸이월드의 ‘오 마이 뮤지컬’ 등 최대 수만명의 회원수를 자랑하는 뮤지컬 동호회들은 단관(단체 관람)과 DVD 상영회 등 한국만의 독특한 뮤지컬 관람 문화를 만들어가며 최근의 뮤지컬 열풍을 이끌고 있다.

    뮤지컬 열풍 8할은 ‘열혈 팬의 힘’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 역을 맡은 배우 브래드 리틀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최근 공연계의 불황 속에서 ‘독야청청’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성공 뒤에도 이들의 힘이 숨어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R석 관람료가 15만원에 이를 정도로 고가 공연이었음에도 주말이면 매진을 기록할 만큼 인기를 모았는데, 이 열광을 이끈 것은 “두 번 봤는데 세 번 더 예매해놓고 한 번 더 봐야 하나 고민중이에요. 자금만 넉넉하다면 매일 보고 싶네여 ㅠ.ㅜ(‘뮤지컬 매니아’ ID: wngP)”라고 말하며 전폭적인 성원을 보낸 열혈 팬들이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마케팅 담당 이현정 씨는 “각 동호회마다 여론을 주도하는 뮤지컬 ‘고수’들이 있어서 흥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랑스 뮤지컬이었는데도 이들이 ‘정말 좋다, 꼭 봐야 한다’고 말하자 다른 관객들이 DVD와 OST를 이용해 사전 공부까지 해가며 극장을 찾아와 놀랐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열기 덕에 ‘노트르담 드 파리’의 OST는 영화 OST를 포함한 전체 음반 시장에서 판매량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공연 제작사들이 뮤지컬 기획 단계부터 이들의 조언을 구하는 일도 낯설지 않다. 지난해 한국뮤지컬 대상에서 여우주연상 등 4개 부문을 차지한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는 재공연을 앞두고 뮤지컬 동호회에 ‘마케팅 아이디어’를 의뢰했다. 상당수 뮤지컬 기획사들은 프리뷰 공연에 뮤지컬 동호회원들을 특별 초청해 ‘최종 평가’를 받은 뒤 작품 내용을 일부 수정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힘’과 ‘감각’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팬텀 프리뷰 나이트’에서 브래드 리틀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쏟아지는 객석의 열광을 보며 “관객은 쇼의 건전지다. 더 많이 충전될수록 음악은 더 좋아진다. 오늘 팬들을 보니 6월 서울 공연이 정말 기대된다”고 감격해했다.

    뮤지컬 마니아들의 열정이 한국 뮤지컬 시장의 발전을 계속 이끌어갈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일이다.

    경력 15년차 뮤지컬 마니아인 다음 카페 ‘뮤지컬 매니아’ 운영자 서정미 씨는 “초기의 뮤지컬 열풍은 해외 유명 작품을 통해 시작됐지만, 이제는 열혈 관객들을 중심으로 우리 창작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 계속 이어지면 ‘뮤지컬은 일부만 향유할 수 있는 비싼 문화’라는 인식도 조금씩 사라져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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