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6

2015.07.13

페미니스트 흡혈귀의 당당한 로맨스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 한창호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5-07-13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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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여름이면 자주 만나는 호러물이다. 여성 뱀파이어가 주인공이고, 화면에는 종종 피가 튄다. 하지만 일반적인 호러영화처럼 오싹할 정도로 무섭진 않다. 오히려 보기에 따라서는 감상적이기도 하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이후 유행이 된 뱀파이어 로맨스가 주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속 뱀파이어 소녀는 보통의 로맨스 인물과는 사뭇 다르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소녀가 흡혈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대상은 전부 남성인데, 그 행위에는 죄에 대한 처벌의 의미가 숨어 있다. 뱀파이어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주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했거나, 그들을 육체적 쾌락의 대상으로만 여긴 남자들이다. 순정 로맨스에 어울릴 법한 가냘픈 뱀파이어 소녀가 처벌하듯 남자를 흡혈할 때, 평범해 보이던 뱀파이어 로맨스는 다른 층위의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누구도 해치지 못할 것 같은 연약한 소녀가 처음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공포의 화신으로 변한 때는 동네 갱스터가 매춘부를 성적으로 착취할 때다. 그때 소녀는 남자를 공격한다. 말하자면 뱀파이어 소녀는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으로 모욕당할 때 살해의 분노를 드러낸다. 왜 뱀파이어는 이런 남자들에게 집착할까.

    영화는 직접적으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단 몇 가지 단서를 남겼다. 이를테면 소녀의 방을 장식한 사진들이 뱀파이어의 정체성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방에는 1980년대 팝문화의 아이콘인 마이클 잭슨, 비지스, 그리고 마돈나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마돈나의 얼굴인데, 아마 소녀는 남녀관계를 주도하는 마돈나의 당당하고 자유분방한 태도, 또 그런 테마의 노래에 매혹된 것 같다. 카메라는 유난히 자주 마돈나와 소녀의 얼굴을 동시에 클로즈업해 잡는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진은 페미니스트 작가 마거릿 애투드의 것이다. 팝스타들 바로 옆에 크게 걸려 있다. SF소설 ‘시녀 이야기’(1985)를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페미니즘 문학의 선두주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 작가다. 미래 사회, 혹은 비현실 공간을 배경으로 여성이 마치 물품처럼 관리되고 통제되는 상황을 그린 ‘시녀 이야기’는 지금도 스테디셀러다. 그러고 보니 영화도 애투드 소설의 분위기를 닮았다. 비현실 공간에서 페미니즘 테마를 다루기 때문이다.



    철저히 혼자고, 영화 속 여성들처럼 남성에게 모욕당한 상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 뱀파이어 소녀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청년을 만나면서 영화는 절정에 이르고, 또 결말을 향해 간다. 뱀파이어는 타자의 피를 빨아 먹고사는 존재인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남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두 연인의 미래를 각자 상상하게 만든 결말도 이 영화의 매력 가운데 하나다.

    감독은 이란계 미국인인 애나 릴리 아미푸르다. 이 영화는 그의 장편 데뷔작인데, 아미푸르 감독은 페르시아어 대사로 진행되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미국 독립영화계의 축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페미니스트 흡혈귀의 당당한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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