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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의 밥꽃, 목숨꽃 사랑 ④

열매를 위한 희생 그래서 더 아름답다

흰색의 로맨스, 배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열매를 위한 희생 그래서 더 아름답다

열매를 위한 희생 그래서 더 아름답다

고택 마당에 소담하게 핀 배꽃.

요즘 세상살이가 참 복잡하다.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회의도 많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다. 시골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선택과 집중을 하고 살아서 얼마나 빨리, 또 멀리 왔는가 싶기도 하다.

잠시 내 어릴 적 풍경으로 돌아가보자. 우리 큰집 마당에는 아주 높다란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높이가 얼추 10m로, 추석이면 그 나무에 배가 드문드문 달렸고 큰어머니가 우리에게 하나씩 따줘 먹어본 배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과육보다 씨방이 발달해 먹을 게 별로 없는 데다 껍질이 질겨 곧잘 잇새에 끼곤 했다. 아마 그 나무는 돌배나무였으리라. 특별히 가꿀 것도 없이 저절로 자라고 열매가 열리는 만큼 먹었던 시절. 요즘 배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동화 같은 풍경이다.

높게 자라던 돌배나무는 다 어디로

열매를 위한 희생 그래서 더 아름답다

활짝 핀 배꽃과 꽃봉오리. 꽃밥이 익어가고 터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한 해 가운데 4월은 많은 나무에게 가장 눈부신 로맨스의 달이다. 배나무 역시 하얀 꽃을 소박하게 피운다. 한 그루만 있어도 그 둘레가 다 환하다. 바람결에 하얀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면 사춘기로 돌아간 듯 두근거린다. 나만 그런 걸까. 아니, 그런 사람이 더 많을 테다.

하지만 농부에겐 배 키우는 일이 로맨스만은 아니다. 자식 키우는 일 못지않게 어렵다. 어떤 점에서는 더할지 모른다. 배는 우선 딱 보기에 때깔부터 좋아야 한다. 모양도 울퉁불퉁, 들쑥날쑥하기보다 마냥 봉곳하니 예뻐야 한다. 자잘한 거보다 큰 게 좋다.



그다음은 혀를 통과해야 한다. 더 달고, 더 시원하며, 더 상큼한 맛으로!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되도록 농약을 덜 치는 친환경 재배이면서 맛도 좋은 쪽으로.

우리 어릴 때처럼 자연이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건 이제 보기가 어렵다. 농부는 겨울에도 가지치기를 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나무를 아는 만큼, 또 사랑하는 만큼 원하는 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나무는 대부분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다. 햇살을 조금이라도 먼저, 더 많이 받고자 함이다. 배나무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농부 처지에서 이걸 그냥 뒀다가는 배도 덜 열리지만 관리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10m나 되는 배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 같은 일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래서 위로 뻗는 가지를 되도록 옆으로 눕혀준다. 이렇게 하면 햇살을 고루 받아 꽃눈도 잘 맺고, 나무 관리도 쉽다.

봄이 되면 농부는 더 바빠진다. 그 눈부시게 하얀 배꽃이 피기도 전, 꽃봉오리 때부터 1차로 솎아준다. 그리고 배꽃이 활짝 피면 추가로 또 솎아준다. 그 예쁜 배꽃을 하나하나 따서 버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배나무는 우선 꽃을 많이 피우고 본다. 나무 한 그루만해도 꽃이 수천 송이에 이른다. 농부는 이 가운데 5~8%가량만 잘 키우면 된다. 나머지 배꽃은 되도록 일찍 따줘, 살아남는 배에 영양이 잘 가게 한다. 될성부른 놈을 일찌감치 선택하고, 집중해서 키우는 거다.

열매를 위한 희생 그래서 더 아름답다

배꽃봉오리. 영양 상태가 나쁘거나 수정이 잘 안 되면 씨가 2~3개로 줄어든다. 더 보기 좋고 더 달고 더 시원하며 더 건강한 배를 위해 사람이 일일이 꽃가루밭이를 해준다(왼쪽부터).

선택과 집중

배꽃은 날씨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4월 중하순에 핀다. 그럼, 이제 사람이 일일이 꽃가루받이를 해준다. 예전에는 곤충이 하던 일인데 이젠 사람이 벌이 된다. 사람이 바라는 배를 얻기 위해. 벌과 견줄 수 없이 덩치 큰 몸으로, 날개도 없이 그 일을 해야 한다.

자, 이쯤 되면 배꽃이 피어도 꽃을 즐길 수 있을까. 얼른 끝내야 할 일로 다가올 뿐이다. 배꽃이 피어 있는 동안 날씨가 좋다면 그나마 다행. 행여나 그 기간에 된서리가 내리거나 하면 그야말로 비상사태다.

선택과 집중, 참 어려운 과제다. 우리는 많은 걸 선택할 수 있지만 집중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바쁘다. 어쩌면 우리는 안 해도 되는 일에 적잖은 시간을 들이는지도 모른다. 배나무는 그리 바쁜 거 같지 않는데 정작 사람만 바쁘니까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하는 삶을 꿈꾼다. 언젠가 하고 싶은 일로 우리네 삶이 꽉 찰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삶꽃’이자, ‘사람꽃’이리.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람꽃’으로 거듭나는 날이 언제일까.

배꽃이 활짝 피는 철이다. 식구들과 배꽃 나들이라도 다녀오면 어떨까. 배나무 아래서 우리 다 함께 ‘사람꽃’을 꿈꿔보자.

배나무 : 장미목 장미과에 속한다. 중국 서부와 아시아 서남부가 원산지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부터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배꽃은 꽃떨기마다 6~7개 남짓 하얀 꽃이 가장자리부터 가운데까지 고르게 모여(산방꽃차례) 핀다. 암수 한 그루이며, 꽃잎은 다섯 장. 암술은 배나무 종류에 따라 2~8개이고 수술은 20~30개가 분홍색 꽃밥으로 모여 있다 꽃밥이 익으면 하나하나 일어서 꽃가루를 터뜨리고 짙은 갈색으로 바뀐다. 우리가 먹는 과육은 꽃받침 통이 자란 것이며, 가운데 단단한 부분은 씨방이다. 씨는 보통 10개 정도지만 영양 상태가 나쁘거나 수정이 잘 안 되면 2~3개로 줄어든다. 참고로 배나무밭 근처에는 향나무를 심지 않아야 한다. 꽃말은 온화한 애정, 위안.



주간동아 2015.04.20 984호 (p68~69)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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