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8

2015.03.09

인정욕구에 뒤틀린 ‘왕따’의 습격

리퍼트 美 대사 테러범은 386 민주화운동 세대 … 민감한 시기 한미관계에 악영향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5-03-09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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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욕구에 뒤틀린 ‘왕따’의 습격

    3월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주최 조찬강연회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습격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가 현장에서 용의자로 연행되고 있다.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낀 건 2000년대 중반부터였다.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들을 과시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특히 2007년 분신 시도 이후 다들 피하곤 했지만 여러 자리를 쫓아다니며 넋두리를 쏟아냈다. 불안하다 싶긴 했어도,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통일운동단체의 한 전직 중견 활동가가 전하는 이러한 설명은 주한 미국대사 테러라는 초유의 사건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가늠할 하나의 단초다. 3월 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주최 조찬 강연회에서 마크 리퍼트 대사를 칼로 공격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 그의 그간 활동 내용과 지인들의 평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3개의 키워드는 ‘인정욕구’와 ‘고립감’, 그리고 ‘왜곡된 소영웅주의’다.

    “80년대에 멈춰 선 사람”

    성균관대 80학번으로 알려진 김씨는 1982년 탈춤과 만담, 풍물, 판화 등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서울 소재 6개 대학 동아리가 연합해 만들어진 ‘우리마당’의 창립을 주도한 멤버였다. 이 시기 대학가에 불었던 ‘우리 것’ 열풍에 힘입어 이 단체는 84년 서울 신촌 기차역 인근에 소규모 공연이 가능한 독립공간을 마련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 무렵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귀에 익을 ‘신라 화랑 어디 가고 스카우트 판을 치나’라는 구호가 이 단체의 작품. “1980~90년대 사물놀이와 판소리가 젊은 층에까지 인기를 끌었던 것은 상당 부분 ‘우리마당’ 덕분”이라는 게 당시 문화계 인사들의 말이다.

    문화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경계가 모호했던 당시 상황으로 이 단체는 크고 작은 탄압을 받기도 했다. 훗날 정치인이나 시민사회단체 원로로 성장하는 상당수 재야인사가 ‘우리마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던 기록도 확인된다. 이 때문에 애초 문화운동으로 출발한 단체는 통일이나 반일(反日) 등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사회운동 위주로 성격이 변화했고, 김씨 개인도 고초를 피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8년 4인조 괴한이 ‘우리마당’ 사무실에 뛰어들어 집기를 부수고 상근자를 폭행한 사건. 당시 평화민주당이 정부기관의 개입 여부를 의심하며 국정조사를 요구했을 만큼 파장이 컸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전통문화가 제도권으로 흡수되고 젊은 층의 호응이 점차 사라지자 이 단체의 위상은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함께 활동했던 이들이 민주화운동 경력을 자산 삼아 유력 정치인으로 속속 거듭나는 사이 자신의 기여나 공헌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는 불만을 김씨가 자주 피력했다는 게 주변 인들의 회고. 실제로 그가 인터넷 블로그에 남긴 글에는 ‘우리마당이 단순한 사설단체가 아니라 30년간 사회공익활동을 이어온 민주화단체임을 인정하는 국회의 입법을 요구한다’는 글이 반복적으로 올라와 있다.

    1995년 신촌의 작은 사무실로 단체를 이전한 김씨는 이후 ‘통일문화연구소’라는 이름을 내걸고 남북관계 개선이나 한미연합훈련 중단 같은 정치 이슈에 대한 활동을 늘려간다. 비정부기구(NGO) 사이에서 조직된 연석회의나 공동 명의의 성명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러나 독도지킴이 등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운동도 병행하는 그의 활동은 단체들 사이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였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2000년대 이후 반미 성향이 강한 민족자주(NL) 계열 단체들이 보수 성향이 강한 반일 민족주의 단체들과 대립관계에 놓인 것과 달리 김씨만 양쪽을 병행했던 것. 한 NGO 대표의 촌평에 따르면 “세상이 변했는데도 아직 80년대에 멈춰 있던 사람”이었다.

    최근 수년 사이 ‘우리마당’은 다른 상근자 없이 사실상 김씨 1인 단체가 됐고, 그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특히 2007년 그가 1988년 괴한 침입사건의 진상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분신을 감행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그는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도 기피인물이 됐고 ‘조심해야 한다’는 수군거림도 이어졌다. 또 다른 운동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5분만 이야기를 나눠봐도 정상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소영웅주의에 정치적 성향 역시 기묘하다 보니, 누구도 ‘편’이 없었다. 문제의 민화협 조찬 같은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시민단체 원로급 인사 상당수가 그의 80년대 활동에 대해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공외교’의 종말?

    불안한 심리상태는 그가 남긴 글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건을 벌인 3월 5일 0시 직후 뿌려진 e메일을 보자. ‘[2015년 3월 5일 특보] 김기종 대장의 긴급 보고입니다!’로 시작하는 e메일은 정부 자료집에 실린 독도 사진의 좌우가 바뀌었다는 주장을 장문에 걸쳐 써내려간다. 이어지는 내용은 독도 관련 학술회의를 진행하고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1980년대 후반에야 등장한 단체들’이 ‘공공자금’을 나눠먹는 것에 대한 규탄. 조악한 색감과 글씨체, 어그러진 문장구조는 정상인의 글이라고 보기 쉽지 않다.

    오래전 그와 만난 적이 있다는 한 안보 전문가는 “김씨의 행동은 최근 미국과 유럽이 공포에 떨고 있는 ‘외로운 늑대(Lone Wolf)’ 문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외로운 늑대란 특정 조직 때문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개인적 반감을 이유로 스스로 행동에 나서는 자생적 테러리스트를 일컫는 말. 흔히 고립감과 인정욕구의 끝에서 범행에 가담하는 아랍계 청년 테러리스트들의 행태와 김씨의 최근 심리 상태가 상당 부분 유사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주한 미국대사관은 한국 국민과의 접촉면을 늘려 우호적인 여론을 확산하는 ‘공공외교(Public Diplomacy)’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반미 성향이 강한 단체 관계자 10여 명만 모여도 대사가 직접 참석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적극적인 행보였다. 리퍼트 대사가 문제의 민화협 조찬에 선뜻 참석한 것이나 다른 참석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보안검색을 실시하지 않았던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김씨 사건을 계기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시점의 미묘함은 사건의 파장을 한층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역사 문제 발언으로 미국의 동북아 정책이 일본으로 기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던 상황이다 보니, 한국 내부의 민족주의 정서를 바라보는 워싱턴 인사들의 ‘오래된 불안’이 증폭되어 양국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관측마저 나온다. 리퍼트 대사와 오바마 대통령의 긴밀한 관계를 감안하면 이러한 기류가 백악관의 한반도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가히 지난해 11월 소니엔터테인먼트 해킹에 이은 ‘나비효과 2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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