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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

지치고 두려운 마음까지 담아내다

쿠르베가 그린 베를리오즈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지치고 두려운 마음까지 담아내다

지치고 두려운 마음까지 담아내다

‘베를리오즈의 초상’, 귀스타브 쿠르베, 1850년, 캔버스에 유채, 61×48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50년 봄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 1869)는 친구 프란시스 웨이의 손에 이끌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베를리오즈를 본 쿠르베는 분명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낭만주의 음악의 정수로 손꼽히는 ‘환상 교향곡’을 작곡한 베를리오즈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 예술계에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당대 대중이나 비평가들은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그리 환영하지 않았지만, 파리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는 대부분 음악과 문학을 결합해 ‘표제 교향곡’을 만들어낸 베를리오즈의 작품 세계를 흠모했다. 대선배이자 예술가들에게 우상 격인 베를리오즈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가 왔으니 쿠르베로선 기쁠 수밖에 없었다.

쿠르베는 중년에 접어든 작곡가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한 초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는 완성된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인수를 거부했다. 어쩌면 베를리오즈의 심기가 이미 뒤틀려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쿠르베는 초상화를 그리는 내내 당시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그 노래는 하나같이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았고, 가락은 베를리오즈의 신경을 몹시 긁어댔다. 여느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베를리오즈 역시 소리에 매우 민감했다. 급기야 베를리오즈는 친구에게 “쿠르베라는 화가는 정말로 덜떨어진 작자”라고 불평을 늘어놓기까지 했다니, 초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이 작품이 베를리오즈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베를리오즈의 불평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쿠르베의 초상화는 베를리오즈의 개성을 십분 살린 수작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잠긴 얼굴의 오른편 실루엣만 드러낸 이 초상화는 베를리오즈 특유의 우울함과 낭만주의 작곡가다운 꿈꾸는 듯한 표정이 절묘하게 교차하고 있다. 다만 쿠르베는 ‘보이는 것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사실주의 추종자답게 작곡가의 얼굴 생김새를 전혀 미화하지 않았다. 요즘 프로필 사진에 ‘포토샵’을 하듯, 당시 초상화가들은 모델 모습을 실제보다 좀 더 잘생기거나 젊게 그려주곤 했다. 그러나 쿠르베는 이런 관례를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로 초상화에 드러난 베를리오즈의 모습은 어둡고 나이 들어 보인다. 이런 점이 베를리오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유명 배우였던 아내 해리엇 스미스슨과 결별하고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레치오와 동거하는 등 다소 복잡한 가정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쉰을 코앞에 뒀으니 노화와 죽음에 대한 공포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심신이 지친 상황을 무척이나 예리하게 묘사해놓았으니, 베를리오즈가 이 초상화를 못마땅해하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베를리오즈의 불평에 대해 쿠르베는 “나는 모델의 얼굴을 진실하게 그렸을 뿐”이라고 뻣뻣하게 맞섰다.



결국 이 초상화는 베를리오즈가 아니라 쿠르베의 소장품이 됐다. 쿠르베는 베를리오즈의 불평과 상관없이 이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해 1855년과 1867년에 연 두 번의 개인전에서 모두 전시했다. 쿠르베와 베를리오즈가 세상을 떠난 지금, 이 초상화는 베를리오즈의 이미지를 가장 잘 재현했다는 평을 듣는다. 무덤 속에서 두 예술가가 허탈하게 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간동아 970호 (p76~76)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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