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8

2014.12.22

함부로 그 옷감을 쓰지 말라

이원석 감독의 ‘상의원’

  •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4-12-22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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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부로 그 옷감을 쓰지 말라
    사극은 장르적으로 코스튬 드라마라 불리기도 한다. 의상극이란 뜻이다. 이제 더는 일상복으로 사용하지 않는 화려한 의상이 수놓인 과거 시간, 거기서 사극의 화려함이 생겨난다. 영화 ‘상의원’은 역사극의 배경적 개연성 이상의 위치에 ‘옷’을 두는 데서 출발한다. 궁 안에 기거하고, 궁을 드나드는 자들이 입는 옷을 만들던 자. 지금으로 치면 최고 수준 디자이너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상의원은 조선시대 왕의 의복과 재화를 관장하던 왕실기관 이름이다.

    발상의 참신함이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궁에서 옷이란 하나의 위계이며 질서이고 문화이자 계급이다. 함부로 쓸 수 없는 색이 있고,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옷감이 있으며, 그러므로 급이나 격에 따라 달라지는 디자인이 있다. 조선시대 궁 안에서 옷은 곧 그 사람의 지위의 증표이기도 했다.

    ‘상의원’이 그리는 갈등의 조감도 역시 궁이란 특수한 공간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왕과 신하의 갈등, 왕과 왕비의 갈등 그리고 그 밑에서 양반이 되려고 참고 참는 어침장(御針匠), 기회를 틈타 다른 활로를 찾고자 하는 빈. 궁은 복잡한 예법만큼이나 다양한 갈등과 욕망이 어긋나고 충돌하는 장소이니 말이다.

    ‘상의원’은 조선왕조를 배경으로 한 기존 사극의 갈등구조를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의상과 그 의상을 만드는 사람이란 참신한 소재를 통해 기시감을 없애려 한다. 문제는 소재는 소재일 뿐 결국 이야기 뼈대는 갈등이라는 점이다. ‘상의원’의 갈등 구조는 현대 사극의 원형격이 된 영화 ‘음란서생’의 서사 구조와 꼭 닮았다. 자유로운 야인이 엄격한 궁 안에서 겪는 갈등이나 복잡한 암투로 둘러싸인 욕망의 계보 등이 그렇다.

    새로움을 위해 왕과 신하 간 수직적 갈등이 아니라 어침장과 이공진 사이 수평적 대립을 투입하긴 했다. 한석규가 연기한 어침장은 재능보다 성실과 근면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반면 이공진(고수 분)은 빼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천재 디자이너다. 이들 사이에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사이 같은 동경과 질투, 열등감과 동료의식이 수평적 대립을 이룬다.



    중요한 것은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나 모차르트는 약점과 단점을 둘 다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천재이자 선, 살리에리가 악인이자 둔재로 대비되지 않는다. 그런데 ‘상의원’에서 이공진은 거의 완벽한 천재이자 선의 증거로 등장한다. 천재적 재능 이상으로 비상한 윤리적 올바름을 보여준다.

    사극에서 늘 뻔하게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도 아쉽다. 한국의 현대 사극에서 여성은 욕망에 불타는 요물이거나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청순 무결한 존재다. 궁 안 여자들은 천사 혹은 요부로 이분화된다. 이공진이 사랑하는 여자, 왕후의 모습이 선이라면 왕후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숙의는 영화 ‘역린’의 정순왕후처럼 욕망에 눈먼 요부다. 정치적 갈등이 팽배한 가운데 왕후의 입지가 아름다운 옷 하나로 지켜지고 무너진다는 것 역시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소재이긴 하지만 관객에게 지나친 관용을 기대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음란서생’이 가져온 혁신을 벗어나지 못한 음란서생식 패러다임이 ‘상의원’ 전체에 감돈다. 콤플렉스를 호소하는 왕이 보여주는 분노가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것도, 이공진의 천재성이 감탄보다 의구심을 주는 것도, 뛰어나 패션 감각으로 창조된 옷이 그다지 대단한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도 모두 캐릭터의 평면성에서 빚어진다. 사극을 코스튬 드라마라 부를 수는 있지만, 옷을 갖춰 입는다고 다 사극이 되진 않는다.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새로운 역사극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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