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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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친구들 챙긴 넉넉한 마음씨

르누아르가 그린 바지유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11-10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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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파 친구들 챙긴 넉넉한 마음씨

    ‘따오기를 그리고 있는 바지유’, 르누아르, 1867년, 캔버스에 유채, 105×73.5cm,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프랑스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앞에 놓인 운명도 그랬다. 동년배인 세 사람은 1862년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서로를 만났다. 모네가 스물둘, 바지유와 르누아르는 스물한 살이었다. 모네와 르누아르가 그저 그런, 또는 빈한한 가정 출신인 데 비해 몽펠리에의 큰 와인 양조장집 장남이던 바지유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다. 바지유는 의대를 다니러 파리에 와 있었고, 취미로 그림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림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네나 르누아르보다는 한결 느긋했다.

    서로 처지가 다름에도 셋은 곧 의기투합했다. 1863년 바지유는 몽펠리에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를 ‘가장 친한 그림 친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영국 출신 알프레드 시슬레까지 합세해 네 명의 신출내기 화가는 파리와 근교를 누비며 그림을 그렸다. 초여름 햇살처럼 젊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들 처지는 판이해졌다. 보수적인 살롱전은 주로 야외 풍경을 그린 이들의 작품을 계속 낙선시켰고, 모네와 르누아르는 먹고살 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즈음 의사 자격시험에 떨어지고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 바지유는 늘 친구들의 어려운 처지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부러 큰 스튜디오를 얻어 모네, 르누아르에게 남는 공간을 빌려주는가 하면, 모네가 애인 카미유 동시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을 때는 친구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그의 그림을 후한 가격에 사기도 했다.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며 고군분투하던 모네, 르누아르에게 바지유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이 친구의 넉넉한 후원이 없었다면 두 사람은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낙향해 농사를 짓거나 도자기를 구우며 남은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늘 친구들을 돕는 데 열성이었지만 바지유 자신도 사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화가였다. 1867년 바지유를 비롯한 샤를 글레르 화실 출신 친구들은 모두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그런데 정작 그림에 생계를 걸고 있던 친구들은 모두 낙선하고 바지유의 ‘가족의 재상봉’만 덜컥 입선했다. 살롱전에 입선하면 전시를 통해 그림을 팔 수 있을 뿐 아니라, 팔리지 않는 그림은 프랑스 정부가 사줬으므로 ‘살롱전 입선’ 경력은 화가에게 대단히 중요했다. 당황한 바지유는 “심사위원들이 실수한 게 분명해”라며 친구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선배 화가 카미유 피사로는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건 실수가 아니야. 바지유 자네는 우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게 분명해.”

    그러나 이 출중한 재능은 너무 어이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애국심에 불타던 바지유는 자원입대했고, 그해 11월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 것이다. 스물아홉도 채 되지 않은 젊디젊은 나이에 맞은 허망한 죽음이었다. 늘 기대던 든든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바지유가 사라진 후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자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1874년 인상파 전시회를 열며 세상에 자신들을 선보일 기회를 얻었다.



    바지유가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작품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현재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인’ ‘가족의 재상봉’ 등이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것만 봐도 바지유의 재능은 참으로 걸출한 것이었다. 르누아르의 작품 ‘따오기를 그리고 있는 바지유’를 통해 한 손에 팔레트를 든 채 진지한 모습으로 캔버스에 붓을 대고 있는 바지유의 초상만이 남아 뛰어난 재능과 너그러운 마음씨를 함께 지녔던 이 아까운 젊음을 추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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