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3

2014.09.01

실컷 먹고 즐기고 추석 명절은 축제의 정점

추석 음식

  • 박정배 푸드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4-09-01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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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 조작 농산물도 없고 비닐하우스도 없던 시절 가을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 사람은 대부분 농촌에서 살았다. 벼는 추석을 전후로 거둬들였다. 햅쌀이 창고를 채우고 산에는 밤과 대추, 배, 사과가 열매를 맺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음력 8월 15일 추석 명절은 실컷 놀고 맘껏 먹고 마시는 축제의 정점이었다.

    가난해서 평등했던 농민들은 평소 먹을 수 없던 쌀로 술을 빚고 떡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소를 잡아 고기도 나눠 먹었다. 절대적 빈곤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추석은 만복(滿腹)의 근원이다. 서울에서는 송이산적을 별미로 먹었다. 인공재배가 불가능한 가을 송이와 쇠고기를 교대로 꼬치에 꽂아 숯불에 구은 송이산적은 향과 졸깃함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추석 대표 음식은 역시 송편(松餠·송병)이다. 이름처럼 햅쌀로 빚은 떡을 솔잎을 깔고 찐 것이다. 추석 송편은 특별히 ‘오려송편’이라 부른다. 오려는 빨리 자라는 조생종 벼인 올벼를 말한다. 송편 소 재료 가운데 팥, 콩, 대추, 밤 등 둥근 것은 보름달을 형상화한 것이고 송편 자체 모양은 반달을 의미한다.

    서울 송편은 작다. 남쪽으로 갈수록 송편 크기가 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은 낯설지만 송편과 더불어 가장 유명했던 음식은 토란국이었다. 달을 닮은 송편은 하늘의 것을, 대추와 밤은 땅의 먹거리를, 토란은 땅속의 수확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기능적으로 토란은 소화에 도움을 준다. 배가 터져라 먹은 사람들에게 토란은 천연 소화제다. 서울에서는 토란탕 국물을 쇠고기로 맑은 장국을 내 간장을 넣어 만들었다. 끈적거리는 토란의 물성 때문에 경기지역에서는 초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 경남 김해에서는 바닷가답게 말린 문어, 다시마, 홍합을 어린 박에 넣은 쑥박(어린 박)탕국을 토란국 대신 끓여 먹었다.

    흰쌀밥에 고깃국은 오랫동안 농민에게 꿈의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소를 잡아먹는 것을 금지했다. 일제강점기 말과 1950년대까지는 무육일(無肉日)이란 제도가 있어 쇠고기 먹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추석과 겹치는 무육일만은 예외였다. 함경북도에서는 추석이면 쇠곰국을 실컷 먹었다. ‘소를 잡는 날이면 마을 사람 모두가 들떠서 술렁거리며 구경을 나올’ 정도였다.



    갈비찜은 어느 동네에서든 추석에만 먹을 수 있는 ‘별식 중 별식’이었다. 개성에서는 호박을 기본으로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같은 비율로 넣은 개성편수를 먹었다. 가을이면 산에 지천으로 열리는 밤은 송편 소로, 밤밥으로 다양하게 들어가 달콤한 추억을 만들어줬다. 하지만 추석 차례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은 술이다. 햅쌀로 지은 술이란 뜻으로 이때의 술을 신도주(新稻酒) 혹은 신곡주(新穀酒), 백주(白酒)라고 불렀다.

    해안가를 끼고 있는 강원도에서는 문어, 방어, 연어, 가자미는 물론 상어(도치), 임연수어(새치)처럼 다른 지역에서는 차례상에 올리지 않는, 이름에 ‘치’자가 들어가는 생선을 올렸다. 제주의 추석도 풍요로웠는데, 옥돔과 돼지고기는 빠지지 않았고 닭을 통째 쪄서 만든 ‘닭적’과 조로 만든 오메기술, 양애(양하)란 채소로 만든 ‘양애나물’도 반드시 올라갔다.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중심지였던 경북의 추석 차례상에는 상어를 염장해 건조한 ‘돔배기산적’과 영덕에서 하루 반나절을 넘어오면서 숙성된 문어를 빠뜨리지 않았다.

    농촌 인구가 급속히 줄었지만 여전히 상당수가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아직도 추석이면 사람들은 연어처럼 고향을 찾아 ‘배부르게 먹으며 취하고 온갖 유희를 하면서 한껏 즐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실컷 먹고 즐기고 추석 명절은 축제의 정점

    추석 차례상에 오르는 대추(왼쪽)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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