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6

2014.05.07

잔잔한 웃음으로 추모와 상처 치유를…

예능 프로그램 결방 언제까지

  • 배선영 텐아시아 기자 sypova@tenasia.co.kr

    입력2014-05-07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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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한 웃음으로 추모와 상처 치유를…

    세월호 사고 이후 한동안 결방된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의 한 장면.

    4월 16일 전남 진도 해역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로 방송가는 먹구름이 잔뜩 낀 침울한 분위기다. 사고 직후 지상파 3사를 비롯해 종합편성채널과 케이블채널은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결방하기로 했다. 닷새 후인 21일을 기점으로 대다수 방송국이 드라마는 정상적으로 방송하기 시작했고, 열흘째인 25일부터는 예능 프로그램도 조심스럽게 제자리를 찾고 있다. 하지만 조용했던 드라마 재개 때와 달리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참담하기 짝이 없는 국가적 비극 한가운데서 웃고 떠드는 내용이 주가 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일이 적절한지에 대해 방송가 안팎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사태 때도 대다수 방송국은 예능 프로그램 결방으로 국민적 추모 분위기에 동참했다. 세월호 사고로 또 한 번 대규모 예능 결방 사태를 맞은 방송가는 다시 일어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던 참담한 비극이 되풀이된 데서 오는 무력감과는 별개로 또 다른 고민을 떠안은 듯 보인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방송사 간 치열한 눈치작전이다. 예능 프로그램 결방과 동시에 각 방송사는 방송 재개 시점을 놓고 분위기를 살폈다. 얼마간의 결방이 적절한지 ‘시기’에 대한 논의가 가장 먼저 시작됐다. 천안함 사태 당시엔 예능 결방이 4~5주 이어졌다. 이 때문에 세월호 사고 발생 후 2주째 일부 프로그램이 조심스럽게 정상화를 시도하자 ‘다소 이른 감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과연 언제까지 결방하는 게 적절한지, 그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

    공영방송 MBC는 사건 발생 열흘째인 4월 25일 ‘가족 예능’과 ‘자극적인 웃음이 없는 예능’이라는 기준을 내세워 일부 예능 프로그램의 방송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그 결과 ‘사남일녀’와 ‘나 혼자 산다’ ‘세바퀴’는 그 주부터 정상 방송되고, ‘무한도전’ ‘우리 결혼했어요’와 ‘일밤’의 ‘진짜 사나이’‘아빠! 어디가?’는 결방됐다. 이 기준 역시 모호하다는 지적을 피해갈 수 없다.

    대책 없이 결방 언제까지



    잔잔한 웃음으로 추모와 상처 치유를…

    대형 사고가 발생했을 때 예능 프로그램이 결방으로 소극적인 추모 뜻을 드러내기보다 적극적으로 사회 위로 기능을 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사진은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위)과 ‘일밤-아빠! 어디가?’.

    분명한 것은 예능 프로그램이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점이다. 결방은 방송사 처지에서는 광고 수익을 비롯한 각종 재정적 손해를 감수하는 결정이다. 대책 없이 결방을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한 예능 PD는 “정확한 수치를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매주 10억 원 이상 손해를 보고 있다”며 방송사 측 부담이 상당하다고 토로했다.

    그런가 하면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작가 등 계약직 스태프 대다수가 회당 급여를 지급받는 상황에서 수 주간 이어지는 결방 사태가 이들의 생계를 위협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예능 작가는 “국가적 비극과 그로 인해 상처 받은 유가족 및 희생자 가족을 떠올리면 생계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제대로 불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어렵사리 재정적 어려움을 고백했다.

    예능 결방을 둘러싼 시청자 의견도 엇갈린다. 도무지 웃을 수 없는 분위기에서 예능 프로그램은 마땅히 결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추모는 강요할 수 없으며 웃음이 주는 위안이라는 것도 있기에 결방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해 한 예능 PD는 “결방된 예능 프로그램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의 심리 저변에는 예능 프로그램 때문에 많은 이가 기억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잊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깔려 있는 것 같다”며 “따라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은 많은 국민이 상처 받은 이번 사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고 웃음으로 치유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 PD는 “천안함 사태나 세월호 사고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공감’인 만큼, 국민의 상처를 웃음으로 치유하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월호 사건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우울한 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진 어린 목숨들을 떠올리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른은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건 당사자들의 아픔에 비할 수 없겠지만, 최근 ‘전 국민이 우울증에 걸려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도 상처를 극복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살기 위해서라도 웃어야 하는 지금, 대중을 웃기려고 존재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시대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그로 인한 상처를 어루만지며 잔잔한 웃음을 전한다면, 감동의 진폭은 분명 클 것이라 믿는다.

    9·11테러 이후 용기 북돋아

    그런 사례도 존재한다. 미국에서는 2001년 9·11테러 이후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나 ‘데이비드 레터맨 쇼’ ‘더 데일리쇼 위드 존 스튜어트’ 등 국민적 인기를 끄는 예능 프로그램이 국가적 비극을 돌이켜보고 이를 기억하는 내용의 쇼를 준비했다. 9·11테러 발생 후 처음 방송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오프닝을 루돌프 줄리아니 당시 뉴욕시장과 테러 참사 현장을 지켰던 소방관들이 맡아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줄리아니 시장은 “우리 가슴은 무너져 내렸지만, 여전히 뛰고 있고 이제는 더 강해졌다”는 말로 뉴욕 시민의 용기를 북돋았다.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도 사회자인 코미디언 데이비드 레터맨은 7분 동안 이어진 긴 독백을 통해 “지금까지는 몰랐을지라도 이제는 뉴욕이 세계 최고 도시라는 것을 매우 잘 알게 됐다”며 뉴욕 전역이 하나가 돼 비극을 함께 이겨내자는 뜻을 드러냈다. ‘더 데일리쇼 위드 존 스튜어트’ 진행자 존 스튜어트는 비극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엔터테인먼트 쇼 호스트로서의 자리를 지켜야 했던 자신에 대한 고백을 진정성 있게 전했다. 간간이 울먹이면서도 특유의 재치 있는 언변으로 웃음을 준 이 장면은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국가적 참사에서 함께 일어설 수 있게 용기를 주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까지도 뉴욕 시민의 가슴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 역시 이 같은 구실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일상에서 웃음을 전해주던 프로그램인 만큼, 결방이라는 소극적인 추모 대신 그들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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