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6

2014.05.07

김정은 또 ‘2인자 갈아치우기’

최룡해 사라진 후 황병서 급부상…생모 ‘고영희 줄기’ 자신의 인물 발탁 시각도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4-05-07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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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또 ‘2인자 갈아치우기’

    4월 9일 북한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제13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의 주석단 모습.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첫 줄 가운데) 좌우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앉아 있다.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최룡해에서 황병서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교체된 것은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북한의 2인자가 다시 한 번 바뀐 것이다. 교체 이유가 무엇인지는 단언하기 이르지만, 평양의 권력지도가 요동치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다.”

    4월 말 안보당국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끊임없는 2인자 갈아치우기가 김정일 시대부터 평양의 권력 운용 패턴이긴 했지만, 김정은 체제 들어 그 주기가 지나치게 짧아졌음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 2009년 2월 ‘김정은 후계’ 공식화와 함께 군부 핵심으로 떠오른 이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 숙청된 것은 3년 뒤인 2012년 7월, 이후 권력이 집중되던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처형된 것이 1년 5개월 뒤인 2013년 12월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여섯 달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2인자’로 불리던 최룡해마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롤러코스터다.

    최룡해의 경질이 권력투쟁에 따른 숙청인지, 와병 등 개인적인 이유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나 당국자 시각도 크게 엇갈린다. 다만 이를 가늠케 해줄 퍼즐 조각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그가 4월 9일 개최된 제13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를 통해 국방위 부위원장에 공식 임명됐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황병서 제1부부장이 차수로 승진했다는 보도가 4월 28일 ‘노동신문’ 1면에 게재됐다는 점이다. 대장 계급장을 단 지 11일 만에 이뤄진 초고속 승진이었다.

    국방위 부위원장 임명 당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된 사진에서 최룡해는 명목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함께 김정은의 좌우에 앉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2인자 공식화’라는 해석 외에 다른 판단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4월 27일 ‘노동신문’은 황병서의 이름을 이영길 인민군 총참모장과 장정남 인민무력부장보다 먼저 호명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황병서가 총정치국장에 임명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순서”라고 잘라 말한다.

    최룡해 숙청? 건강 이상?



    김정은 또 ‘2인자 갈아치우기’

    김정은 제1비서의 인민군 534군부대 지휘부 시찰 소식을 전한 ‘노동신문’ 2014년 1월 12일자 1면 사진. 왼쪽 끝이 최룡해, 오른쪽 뒤편에 서 있는 인물이 황병서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북한 관영언론 사진 속의 황병서는 두드러지지 않는 위치였지만, 상황이 바뀌는 데는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인민군에 대한 통제를 책임지는 총정치국장은 명실상부한 군부 최고실력자. 국방위원회는 김정은 체제 들어 상징적 위상으로 급격히 재편됐다. 쉽게 말해 총정치국장이기 때문에 국방위 부위원장에 임명된 것이므로, 만에 하나 최룡해가 부위원장직을 유지한다고 해도 권력 핵심에서는 밀려났다고 보는 게 옳다는 의미다. 이제부터는 황병서가 새로운 2인자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과연 최룡해는 숙청된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4월 9일까지도 징후가 없던, 매우 급박하게 진행된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얘기가 된다. 김정은 체제의 첫 최고인민회의라는 상징성을 감안하면 곧 숙청될지 모르는 인물을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발탁할 수는 없기 때문. 뒤집어 말하자면 4월 중순 이후에야 숙청작업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장성택 숙청 과정에 최소 수개월의 사전조사와 준비기간이 소요됐음을 감안하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김정은 자신도 미리 감지하지 못한 ‘사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시간표에 가깝다.

    숙청설에 무게를 싣는 전문가들은 이를 이영호·장성택 숙청의 연장선상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러 권력집단이 특정인 제거를 위해 연합했다가, ‘거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새로운 2인자를 제거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이영호 총참모장 숙청이 장성택 세력과 당 조직지도부, 국가안전보위부 등이 연합해 이른바 ‘신군부 세력’을 제압한 것이었다면, 당 조직지도부와 총정치국, 국가안전보위부가 연합해 장성택 세력을 제거한 것이 지난해 연말의 일이고, 이번에는 황병서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지도부가 총정치국을 접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이승열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모든 권력을 조직지도부로 집중해 선군정치 이전 김정일 시대의 권력체계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건강 이상설에 힘을 싣는 이들은 4월 9일부터 27일까지의 짧은 시간 안에 최룡해 같은 거물을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아무리 북한 체제라 해도 그런 식의 싸움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개인문제 때문에 교체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 그가 이미 지난해 연말부터 10~20일씩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 반복됐고 1월 12일 공개된 영상에서 오른쪽 다리를 절었던 것도 이러한 시각에 무게를 싣는다.

    황병서의 총정치국장 임명이 단계적 방식으로 공개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군부를 통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총정치국장 직위의 중요성 때문에 공석으로 비워둘 수는 없어 황병서를 급히 발탁했지만, 이를 호명순서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공식화하고 있는 것은 최룡해를 배려하는 조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에 의한 군 통제 반영

    숙청이냐 와병이냐 여부는 시간이 흐르면서 가려지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황병서라는 인물 자체다. 새로 2인자가 됐다는 이 인물에 대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 이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정부도 마찬가지다. 4월 말 들어 관계당국 실무파트에서는 황급히 황병서에 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느라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남측 레이더망에 포착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05년 5월 조직지도부 부부장 재직 사실이 공개되면서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통일부 인물자료 역시 이 시기 이후의 경력만 기록하고 있다. 군 출신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확실치 않고, 최룡해 등 그간 북한 최고지휘관이 대부분 수학했던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인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1949년생으로 알려진 나이 역시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 다만 이번 임명이 세대교체와 무관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공식자료만 봐도 50년생인 최룡해에 비해 한 살 많고, 실제로는 더 고령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기 때문.

    2010년 9월 인민군 중장, 같은 해 9월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2011년 4월 인민군 상장 승진. 이후 공개된 이러한 이력은 그가 당 조직지도부에서 군을 담당해왔음을 잘 보여준다. 국가기관 전체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는 조직지도부에서 군을 담당해온 이력이 군에 대한 통제를 책임지는 총정치국장 직위와 꼭 맞아떨어지는 것 역시 분명하다.

    반면 당에서 군을 통제해온 인물이 인민군 최고직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군에 대한 당의 우위’ 혹은 ‘당에 의한 군 통제’라는 김정은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최룡해 역시 근본적으로는 당료 출신이긴 해도 ‘항일유격대 영웅 최현의 아들’이라는 상징성이 있었던 반면 황병서는 해당 사항이 없기 때문. 당 출신이 군 최고수뇌를 장악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황병서에게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한 것은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현지지도 수행빈도가 급격하게 늘어난 지난해 하반기부터. 10월까지만 해도 평균 60%대에 달하는 최룡해의 수행비율이 압도적이었지만, 11월 들어 황병서의 동행비율이 75%까지 뛰어올라 역전한 ‘사건’ 때문이다. 올해 들어 3월까지 기록을 살펴보면 황병서의 동행비율은 총 81%로 56%에 불과한 최룡해를 크게 앞질러 단연 선두를 차지했다. 김정은의 귀를 차지해 권력 2인자로 우뚝 서게 된 셈. 이 역시 불과 반년 사이 일이다.

    장성택 숙청 ‘삼지연 회의’ 주도

    김정은 또 ‘2인자 갈아치우기’

    2012년 4월 13일 평양 만수대언덕에서 열린 김정일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박수를 치던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맨 오른쪽)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이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숙청됐고, 다시 3개월 뒤 김정각 인민무력부장(맨 왼쪽)은 김일성군사종합대 총장으로 옮겨갔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최룡해 총정치국장(왼쪽에서 세 번째)마저 최근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의 이력 상당 부분에서 장성택 전 부위원장과 대립선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조직지도부 부부장 직위가 확인된 2005년은 장 전 부위원장이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를 이유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서 밀려난 2004년 이후의 일. 다시 말해 황병서는 장 전 부위원장의 정적이었던 이제강 전 제1부부장 라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이제강이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 우상화’ 작업에 몰두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 김영춘 당시 총참모장 등과 함께 조선인민군출판사 명의의 ‘학습제강’을 펴내 배포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서는 이 작업 과정에 황병서가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당시 고영희 우상화는 김정철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사전준비에 가까웠지만, 어떻든 김정은의 생모이기도 한 까닭에 쉽게 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장성택·김경희 부부가 한때 ‘김정남 후계’에 더 무게를 실었다는 사실이다. 2001년 이래 김정남이 마카오와 중국 등을 떠돌 무렵에도 장성택 일가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남측 정보당국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장성택이 권력에 복귀해 후계체제 구축의 중심축 구실을 맡은 2010년 들어 이제강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지만 황병서는 살아남았고, 지난해 장성택 숙청 과정에서 이른바 ‘삼지연 회의’를 주도하며 중심을 맡았다. 한때나마 김정남을 밀었던 장성택의 ‘원죄’가 처형의 한 배경이었다면, 친형인 김정철과 어머니 고영희를 지지했던 황병서의 ‘옛 공적’이 10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 권력 2인자의 지위를 선사한 셈이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는 황병서야말로 그간 반복된 ‘2인자 갈아치우기’의 종착역일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이영호나 장성택 등 아버지가 정해뒀던 후견인을 차례차례 제거하고, 이제는 ‘고영희 줄기’에 대한 충성으로 무장한 명실상부한 자신의 인물을 2인자로 발탁한 것일 수 있다는 시각이다.

    ‘단기적 안정과 장기적 불안정.’ 장성택 처형 직후 김근식 경남대 교수가 내린 촌평이다. 그렇듯 과감한 숙청을 단행할 수 있을 만큼 김정은의 권력이 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목숨을 건 게임이 되고 나면 장기적으로 체제의 미래를 낙관하기는 어렵다는 것. 이러한 평가는 이번 국면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숙청이든 건강이상이든 잦은 핵심 멤버 교체는 불안을 키울 수밖에 없고, 특히 권력투쟁의 결과라면 우려는 한층 더 심각해진다. 모든 권력엘리트가 목숨이 위태롭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상황, 그 첨예한 칼끝은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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