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2

2013.11.11

故 김현식·유재하를 또다시 추억함

잔인한 계절 11월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3-11-11 10:5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故 김현식·유재하를 또다시 추억함

    9월 9일 밤 제2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추진 회의에 모인 ‘유재하 동문회’ 회원 가수들.

    흔히 ‘잔인한 계절’ 하면 4월을 떠올리지만, 음악계에서는 11월을 잊지 못할 것이다. 유재하와 김현식이 각각 1987년, 90년 1일 세상을 떠났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진원)이 3년 전 7일 너무 빨리 갔다. 그들을 잊지 못하는, 잊히지 않게 하려는 이들은 매년 어떤 식으로든 기념사업을 하거나 추모 시간을 가져왔다. 올해는 유재하와 김현식이 저세상에서 미소 지을 만한 일이 연이어 있었다.

    먼저 김현식이 생전 남겼던 녹음이 음반으로 되살아났다. ‘2013년 10월’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앨범은 2장으로 구성됐다. 한 장은 그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뒀던 미발표곡 9곡을 담았고, 다른 한 장은 그가 투병 중 병실에서 녹음했던 12곡의 라이브를 실었다. 사후 20년이 넘은 지금에야 이 앨범이 공개된 이유는 애초 그의 음원을 담은 테이프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현식은 정식 레코딩을 하기 전 홀로 기타를 치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두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자체 모니터링을 하기 위해서다. 이 앨범에 담긴 미발표 9곡은 그렇게 녹음한 것이다.

    1988년 ‘비처럼 음악처럼’이 담긴 4집을 내놨을 때부터 김현식의 몸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상을 떠나기 전 발매한 5집의 ‘넋두리’에 담긴 그의 목소리, 투병 기색이 완연한, 쩍쩍 갈라지는 소리는 육신의 고통을 술로 잊어야 비로소 노래할 수 있던 무렵에 녹음한 것이다. 사그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빛나는 불꽃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9곡은 ‘내 사랑 내 곁에’를 담았던 유작 6집 앨범에도 실리지 못했던 노래들이다. 고통이 극에 달했기에 ‘넋두리’나 ‘내 사랑 내 곁에’에서처럼 갈라지는 포효조차 할 수 없던 시간, 몸으로 부른 노래들이다. ‘그대 빈들에’의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젠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나 봐/ 이젠 잊어야 할 시간이 되었나 봐/ 아 아무도 없는 이 밤에/ 누굴 기다리나 무엇을 찾아 헤매나….’



    힘겨워하는 기색이 완연한 이 노래는 다른 8곡보다 더 애석한 마음이 들게 한다. 노래 자체 멜로디와 에너지가 생전 히트곡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건강이 남아 있었을 때 이 노래를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정식으로 녹음한 음악이 아니기에 열악할 수밖에 없는 음질은 이 ‘고고학적 가정’을 한층 깊게 만든다. 병상에서 노래했던 12곡의 라이브 실황(?)과 달리 최신 기술로 다른 악기의 소리를 덧입혀 1990년과 2013년을 만나게 했다. 생전의 김현식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혹은 그의 사후에야 김현식을 알게 된 사람이라도 꼭 들어야 할 앨범이다.

    김현식이 앨범으로 2013년을 방문했다면 유재하는 유지로 2013년을 찾아왔다. 향년 26세로 사망한 지 2년 후인 1989년 생전에 남긴 한 장의 음반 수익과 성금을 바탕으로 그의 유족은 유재하 가요제를 만들었다.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에 비해 음악 지향적이던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조규찬, 유희열, 김연우, 말로, 이한철, 루시드폴, 스윗 소로우, 오지은 같은 싱어송라이터를 배출하며 ‘가수’가 아닌 ‘창작자’의 축제로 굳게 자리 잡았다.

    강변가요제는 일찌감치 사라졌고 대학가요제마저 지난해를 끝으로 폐지됐다. 오디션 프로그램만이 범람하는 시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도 위기를 맞았다. 스폰서가 나타나지 않아 폐지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유서와 의미를 동시에 갖춘 이 행사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건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 음악인들이다. 일명 ‘유재하 동문회’. 초기 수상자들이 기획을 맡고 후배들이 진행을 자임했다. 악곡을 구상하던 머리로 공연 아이디어를 짰고, 기타와 피아노를 치던 손으로 포스터를 만들며 보도자료를 썼다.

    유재하의 기일이던 11월 1일 이한철, 스윗 소로우, 오지은, 노리플라이의 권순관 등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 27명이 모여 ‘유재하 동문회’라는 이름으로 사전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생중계됐다. 이런 노력을 거쳐 11월 24일 유재하 모교인 한양대 백남음악관에서 제2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열린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의 지속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모더니즘을 제시했던 위대한 싱어송라이터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자, 예능에 방점을 찍는 오디션 프로그램 시대에 맞서는 음악인들의 자기 존재 증명이기 때문이다. 잔인한 11월,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추억과 존중이 흐른다. 계절의 온도를 높인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