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0

2013.10.28

“간절함과 자신감으로 또 다른 도전 공 던지죠”

메이저리그 124승 한국 야구 레전드 박찬호

  • 정리=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입력2013-10-28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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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전드 야구선수 박찬호가 9월 27일 삼성그룹이 주최하는 ‘열정樂서’ 콘서트 부산 무대에 섰다. 대한민국 선수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동양인 최다승을 기록한 그의 화려한 전적은 수많은 야구팬과 스포츠 꿈나무에게 살아 있는 전설로 기억된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정상 자리에 선 그의 고군분투기.

    안녕하세요. 여기에 계신 젊은 분들을 뵈니 20대 시절의 제가 생각납니다. 당시 저는 미국에 진출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또 기쁨의 시간과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합니까.” “어떤 정신력으로 어려운 시절을 극복했나요.”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기억을 못 할 뿐이에요. 왜냐하면 대부분 지금 겪는 어려움이 제일 크고 힘들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예전에 그랬습니다.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도 힘들었고, 심지어 중학생과 고등학생 때 훈련이 너무 힘들어 도망갔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하루 만에 잡히고 말았지만요(웃음).

    치즈 하나로도 인생이 바뀐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시련을 겪으면서 과거 시련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이 더 힘들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착각하면 우리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힘들 텐데, 그럼 앞으로 나아가지 말아야 하나요?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더니 와, 끝내주더라고요. 양복을 입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서명 공세가 이어지고, 기자들이 쫓아다니고…. 마치 제가 대통령이라도 된 것처럼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높은 분들이 먼저 와서 악수를 청하고 식사 초대까지 하고 그랬거든요. 당시 메이저리그 150년 역사상 단 17명만이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는데 제가 그 17번째 선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처럼 그때도 많은 분이 저에게 박수를 쳐주셨죠.

    그런데 그 박수가 저를 부끄럽고 힘들게 한 순간이 곧 찾아왔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지 17일 만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게 됐거든요. 제가 잘 못 던진 건지, 타자가 잘 친 건지(웃음).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더니 ‘대우’받을 일이 없어지더군요. 게다가 마이너리그에선 같은 팀 내에서도 경쟁이 장난이 아닙니다. 상대가 못해야 내가 메이저리그로 올라갈 기회가 생기니까요. 메이저리그 팀 선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부상이라도 당해 자리를 비우면 난리가 납니다. 마이너리그 선수 몇백 명 가운데 단 한 명만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해도 몇백에서 몇천 달러밖에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동양인 선수가 100만 달러라는 큰돈을 받고 왔으니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게다가 이 동양인 선수는 영어도 못하지, 마늘냄새나 풍기지, 잘 던지지도 못하지… 좋아할 만한 구석이라곤 없었던 거죠. 가까이만 가면 다른 선수들이 마늘 냄새난다, 또 한국 음식 먹었느냐 하고 놀려댔습니다. 저를 ‘코리안 마늘’이라고 부르면서 킁킁 냄새 맡는 소리를 내는데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노이로제에 걸려 하루에도 샤워를 5~6번씩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냄새난다고 저를 놀리던 선수 하나가 껌 종이를 제게 던졌어요. 결국 그 선수와 싸움이 붙었고 감독한테까지 불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는 뭐라 뭐라 이야기를 계속 하는데 저는 영어를 잘 못하다 보니 ‘배드 보이(bad boy)’ 한 마디밖에 못 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싸움의 원인제공자로 몰려 벌금까지 내고 혼이 났습니다.

    “간절함과 자신감으로 또 다른 도전 공 던지죠”

    전 야구선수 박찬호가 ‘열정樂서’ 콘서트에서 강연하고 있다.

    그런 일까지 당하고 나니 도저히 미국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집에 가는 길에 맥주 6캔들이 팩을 샀습니다. 그전에는 술을 마시면 야구를 못 하는 줄 알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해야 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와서 정말 그렇게 믿었거든요. 그런 제게 맥주 6캔은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그 정도 마시면 죽는 줄 알았죠. 더는 야구를 못 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다음 날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찬호야, 밥은 먹었어? 잘 지내는겨?” 하는 겁니다. 도저히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잘 지내고 있다. 미국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이랑도 무척 잘 지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고선 바로 끊었죠. 거짓말을 해서 그랬는지 감정이 북받쳐 엄청 울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온 맥주를 모두 버렸습니다. 사실 다시 갖고 가면 슈퍼마켓에서 환불해주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쫄쫄쫄 다 따라 버렸어요. 한순간이나마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한 저한테 상처를 주고 싶었거든요. 그러고선 미국 올 때 싸들고 온 김치며 한국 음식도 다 버렸습니다. 한국 음식을 먹지 말자, 결심했죠. 왜? 살고 싶었거든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여기 계속 있자’ 생각은 했는데 내일 다시 야구장에 나가려니 너무 막막하더군요. 저랑 싸운 선수를 죽여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처럼 분했어요. 그래서 치즈를 잔뜩 샀습니다. 저는 미국 선수들한테서 치즈 냄새가 나서 참을 수 없었거든요. 한국 음식 대신 냄새나는 치즈를 먹었어요. 그리고 영어 공부를 했습니다. 감독한테 말 한 마디 못 한 게 한이 맺혔거든요.

    힘들 때 거울 속 나 자신 발견

    “간절함과 자신감으로 또 다른 도전 공 던지죠”

    ‘열정樂서’ 콘서트에서 개그맨 김기열의 사회로 박찬호가 팬들과 대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니 더는 냄새난다는 소리를 안 하더라고요. 그때서야 나한테 마늘 냄새가 역겹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한테는 치즈 냄새가 역겹지 않구나, 이 사람들은 그냥 싫은 냄새가 나서 싫다고 말한 거지 내가 자기들이랑 싸워서 야구를 그만두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마이너리그 때보다 더 힘들었던 건 텍사스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얻은 영예로운(?) 별명도 있잖아요. ‘매국노’ ‘먹튀’…. 텍사스 이적 후 부상 악화와 성적 부진이 계속되니까 다저스 시절엔 저를 칭찬하던 사람들이 다들 등을 돌리고 욕을 하더라고요. 제가 다저스에 있을 땐 ‘형’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내려 애쓰던 한국 특파원 기자들도 텍사스 이적 이후론 기사에 이상한 소설까지 만들어 써댔고 선수들도 저에게 실망했는지 저랑 눈도 잘 안 마주쳤어요.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이 저를 배신하고 미워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 고통스러워 살고 싶지가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명상을 하는데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요. 거울을 봤는데 어떤 녀석이 막 울고 있는 거예요. 우는 제 모습을 그때 처음 봤습니다. 어찌나 가엽던지 ‘저 녀석, 살려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다음 날부터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야구장에 갔습니다. 사실 그때 가장 싫은 건 감독의 방 앞을 지나가는 거였어요. 감독과 마주칠까 봐 겁이 났죠. 하지만 용기를 냈어요. 울고 있던 거울 속 나를 살려야겠단 생각에 일부러 감독의 방으로 들어갔어요. “하이, 굿모닝” 그 한 마디 하고 나오는데 어찌나 긴장했는지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었더라고요. 그래도 매일,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감독에게 인사하러 갔어요. 그랬더니 감독도 점점 반갑게 이야기를 건네더라고요. 어떨 땐 1분 동안 몸 상태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그랬죠. 선수들에게도 일부러 제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건넸어요.

    마이너리그에 머문 2007년 한 해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은퇴 권유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부모님과 아내도 저에게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했어요. 고통스러워하는 제가 너무 안타까웠던 거죠. 그때 유일하게 저에게 “한 번만 더 해봐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었습니다. 기회만 생긴다면 123승이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123승이 뭔지 아시죠? 노모 히데오 선수의 아시아 타이 기록입니다. 그 목표에 도전하고픈 마음이 무척 간절해 다저스에 연락을 했어요. 괜찮다면 나를 다시 써달라고 부탁했죠.

    간절함은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절제가 쉬워져요. ‘맥주가 먹고 싶다’ 이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죠. 인터넷을 한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그런 것도 아예 생각이 나질 않더라고요. 오로지 야구 생각만 하니까 딱 9시에 잠자리에 들게 되고, 88마일도 던지지 못하던 제가 다시 97마일까지 던지게 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 잠재력을 막고 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고통과 시련은 성장의 무기

    결국 선발투수였다면 더 빨리 이룰 수 있었던 124승 기록을 구원투수였던 저는 더 어렵고 어렵게, 우여곡절 끝에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요? 결국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찾아야 해요. 혼자 찾기 힘들 땐 거울을 보세요. 그리고 거울 속 그 친구와 대화해보세요. 그 친구에겐 이 세상 누구한테보다 진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울고 싶을 때 울고 욕하고 싶을 때 욕하고,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자, 포기하지 말자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124승을 한 날의 경기를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124승을 했을 때 우리 팀 사람들 모두 난리가 아니었어요. 비록 우리 팀은 꼴찌였지만 동료들은 개인 명예를 더 존중하고 기뻐해준 거죠. 그런데 막상 노모 선수의 기록을 깨고 나니 이상하게도 저 자신은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막 슬퍼지더라고요.

    혼자 호텔에서 한참을 생각했어요. 왜 이렇게 슬프지? 왜 이렇게 공허하지? 사실 저는 노모 선수의 123승 타이틀이 사라진 것이 슬펐던 겁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125승을 하면 박찬호의 124승은 사라질 테죠. 이렇게 노력해 이룬 업적이 사라진다는 게 허무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그렇다면 난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이 124승이란 건 숫자에 불과한 것이구나.’ 124라는 숫자가 나를 기쁘고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124승의 기록을 세우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낸 ‘과정’이 나를 기쁘고 자랑스럽게 만드는 거더라고요. 무엇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또다시 도전하게 만드는지 깨닫게 되니 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워졌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미래는 옵니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보다 실현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하는 사람의 에너지가 더 큽니다. 꼭 이겨야지 하고 생각한 날은 거의 이겨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몸이 아픈데, 잘 치는 타자만 있는데…, 이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실패할 확률이 높을 때 이긴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되니까요.

    고통과 시련은 스스로를 강하게 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세요. 저는 야구선수로 은퇴했기에 미래가 막막할지언정 두렵지는 않습니다. 미래는 올 거니까요.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더 강하고 지혜로워질 거라 믿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믿고 순간순간 스스로에게 집중하면서 그 안에 내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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