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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l 연쇄 살인마 유영철 사건 10년 01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유영철에게 어머니, 아내, 아들 한꺼번에 잃은 고정원 씨 세월 갈수록 더하는 그리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고정원(71·사진) 씨는 2003년 10월 9일을 잊지 못한다. 그의 팔순 노모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 아들이 이날 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몰살당했다. 세상에 대한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던 유영철이 쇠망치를 들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살해하던 때였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던 고씨의 자택은 한적하고 고급스럽게 보인다는 이유로 범행 표적이 됐다. 고씨는 이날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아직 잊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참혹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럼에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은 지난 10년간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폭음과 통곡으로 망가진 몸은 10월만 되면 더욱 열이 올랐다.

가족의 10주기 장학기금 조성

10월 9일 고씨는 아픔만 가득하던 10월에 새로운 기억을 더했다. 가족 사망 10주기를 맞아 그들 이름으로 장학기금을 만든 것. 자신처럼 가족을 잃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범죄 피해자 자녀들이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그동안 월세방에서 홀로 지내며 모은 돈 3000만 원을 기꺼이 내놓았다. “앞으로도 살아 있는 한 매년 10월 9일에 돈을 보탤 것”이라고 말하는 고씨를 그가 살고 있는 서울 구로구 한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방에 들어서자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가족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갈한 한복 차림의 노모를 가운데 두고 앉은 고씨와 그의 아내, 그리고 뒷줄에 선 두 딸과 아들 모두가 활짝 웃고 있었다. 고씨는 “우리 아들이 대학 졸업하던 날 집에 사진사를 불러 찍은 사진”이라며 가족을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얘(막내딸)가 대학교 1학년, 얘(큰딸)는 3학년, 그리고 얘(아들)가 4학년 졸업반이에요.” 설명하는 말투가 현재형이다. 그는 이후에도 줄곧 그랬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 가족이 오순도순 살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우리 아내는 늘 가계부를 쓰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눈만 오면 그렇게 동네 곳곳에 염화칼슘을 뿌려요. 사람들 사고 난다고…” 했다. 여전히 그 시절에 살고 있는 듯 이야기를 풀어내다 생각이 현실로 돌아오면 멈칫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돌렸다.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고정원 씨 방 벽에 걸려 있는 행복하던 시절의 가족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고정원 씨, 어머니, 아내, 아들이다. 두 딸의 얼굴은 고씨 요청으로 가렸다.

사진 속에서 함께 카메라 앞에 선 두 딸은 이후 결혼해 ‘10년 전 그날’ 화를 피했다. 당시 고씨는 건물 경비원으로 일하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 젊은 시절 컴퓨터 관련 사업을 했던 고씨는 외환위기 무렵 회사를 정리했다. 이후 찾은 일이 경비원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방석 세 개 놓으면 꽉 차는 공간에서 노동하며 돈을 벌었다. 서울 구기동 집은 1984년 사업이 잘되던 시절 지은 것이다. 커다란 가족사진 옆에는 그가 평생의 꿈을 담아 지은 이 양옥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한 장 놓여 있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신문을 돌리며 생계를 꾸렸던 고씨는 좋은 집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성공해 저런 집을 짓고 살아야지” 마음먹곤 했다고 한다. 특히 나지막한 담장으로 벽을 두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였다고 했다. 마침내 집을 지을 수 있게 됐을 때 그는 설계부터 벽돌 한 장까지 일일이 신경 썼다. 담장 높이는 1m 20cm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담을 넘어 유영철이 집에 들어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씨는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했다고 했다. 아내는 가계부를 정리하다 “오늘이 적금 만기 날이네요. 이따 저녁때 내가 용돈 줄게요”라며 활짝 웃었다. 고씨가 일을 마친 뒤 저녁 6시 반쯤 동네 한의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내와의 마지막 인사는 “몸조심해”였다.

“우리는 헤어질 때 꼭 뽀뽀를 해요. 그날도 딱 뽀뽀를 하려는데 아내가 고개를 돌리데요. ‘왜? 내가 싫어졌어?’ 했더니 입술이 부르터서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아내가 동네 배드민턴 클럽 회장이었는데 그 무렵 구청장대회가 있어서 준비하느라 바빴거든요. 몸조심하라고, 이따 저녁때 보자고 한 게 마지막이었어요.”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믿기 힘든, 눈앞에 펼쳐진 지옥

이후 아내는 온종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달려간 집은 조용했다.

“그 시간이면 저 온다고 어머니랑 아내가 저녁 준비하느라 분주할 때예요. 그런데 불 하나 켜진 게 없었어요.”

초인종을 눌러도 기척이 없어 그는 담을 뛰어넘었다. 현관문을 여니 아내가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여보”하고 몸을 만지자 섬뜩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아내는 머리를 뭐로 맞았는지, 두개골이 다 깨진 상태였다. 2층에서 들리는 라디오 소리를 따라 정신없이 계단을 올라가자 이번엔 아들이 보였다.

“이놈이 얼마나 힘이 센지, 얼마나 힘껏 내리쳤는지, 우리 아들이, 걔 눈이….”

고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안구가 밖으로 다 쏟아져 나와 있었다”고 했다. 욕실 앞에 쓰러진 어머니 역시 머리를 둔기로 맞아 절명한 모습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112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경찰이 왔다.

“그 뒤로 집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경찰차에 갇혀 있다가 조사를 받았고, 다음 날 시신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는 얘기를 들었죠.”

당시 유영철은 이미 서울 신사동 주택에 침입해 쇠망치로 집주인들을 내리치는 범행을 저지른 뒤였다. 경찰은 동일범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지만, 범인을 잡지는 못했다. 한동안 고씨는 ‘그놈을 내 손으로 찾아 죽여버리고 싶다’는 분노와 ‘나 또한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한숨도 자지 못했고, 가만히 있어도 몸이 덜덜 떨렸다. 대낮에도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알 수 없으니 더 무서웠어요. 살면서 원한 살 일을 한 적 있나 아무리 곱씹어봐도 모르겠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공포에 떨다 또 한순간 분노가 치밀었죠. 그놈 잡히기만 하면 내 손으로 죽이고 나도 우리 가족 따라가겠다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그러면서도 매순간 가족이 그리웠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평생 함께 살리라 마음먹었던 집에 혼자 다시 들어갈 자신이 없어 헐값에 집도 팔았다. 경기도 과천에 사는 딸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때 그의 눈에 성당이 보였다. 아내가 생전에 “언젠가는 같이 성당에 다니자”고 하던 게 기억났다. 용기를 내 문을 열고 나서자, 신기하게 성당 가는 길만은 두렵지 않았다.

이후 힘들 때마다 성당을 찾았다. 집에서도 성경을 필사했다. 신약을 세 번 쓰고, 신약과 구약을 각각 한 번씩 또 썼다. 그렇게 대학노트 20권을 가득 채울 무렵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2004년 7월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영철이었다. 언론에 온통 그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다. 어머니, 아내, 아들뿐 아니라 무고한 다른 사람들도 그의 손에 희생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 유영철은 당시 26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고, 수사 결과 21명을 살해하고 이 중 11명의 시신을 훼손 암매장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다시 몸이 떨렸어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누군가가 내게 이토록 큰 고통을 안겨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더는 못 살겠다, 다 끝내자 생각했을 때 유영철에게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 탄원서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2004년 7월 유영철을 체포한 후 경찰이 그가 사체를 암매장한 서울 봉원사 계곡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고씨는 “이후 그 아이들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고 했다. 부모를 잘못 만나 어린 시절부터 세상 밖으로 내몰리게 된 아이들, 유영철이 죽고 나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젊음을 채 꽃 피워보지도 못하고 눈 감은 4대 독자 생각도 났다. 유영철이 죽으면 또다시 비극이 반복되는 것 아닌가. 그걸 막기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씨는 결국 경찰과 법원에 유영철에 대한 탄원서를 냈다. ‘또 다른 생명이 인위적으로 꺾이는 건 원치 않는다.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성경을 필사해 성당에서 받은 상금도 유영철의 영치금으로 보냈다. 고씨는 이 이야기를 하며 몇 번이나 “유영철을 죽이면 그 자식은 또 어떻게 되느냐고. 그런 비극이 반복되는 건 막아야 한다는 거지”라고 되풀이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탄원서를 냈다는 걸 알고 딸들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고,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 때문에 유영철이 감옥에서 나오면 나를 죽이러 올 것 아니냐”며 울부짖었다.

“나는 유영철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풀어주자는 게 아니에요. 다만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사회에서 돌봐주지 않아 그렇게 된 걸 어떻게 다 유영철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죠. 국가도 책임을 져야 하고, 그러자면 유영철에게 살면서 회개할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 겁니다.”

유영철은 고씨의 탄원서에도 2005년 사형 확정판결을 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고씨는 몇몇 언론이 그가 유영철을 위해 탄원서를 낸 사실을 보도하면서 자신을 ‘원수를 용서한 성자(聖者)’처럼 묘사한 걸 부담스러워했다. “사람들은 내가 큰 용서를 했다고 말하지만,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다. 여전히 힘들 때도 많다”는 것이다. 고씨가 과천 딸네 집을 떠나 혼자 사는 것도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그가 눈을 뜬 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기도다. 집 안에 마련해둔 작은 제단에 촛불을 켜고 가족 세 명을 위해 기도하면서 때로는 울고, 때로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특히 꿈에서 아내를 만난 날은 아내의 손이, 살결이, 목소리가 그리워 견딜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유영철이 죽는다 해도 이 고통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사형만은 반대한다는 게 고씨의 이야기다.

그는 사건 이후 유영철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다만 탄원서를 낸 뒤부터 명절이나 10월 가족이 세상을 떠난 무렵이 되면 영치금을 보낸다. 9월에도 사형수들을 돌보는 천주교 사제를 통해 돈을 조금 보냈다고 했다.

유영철은 2007년 감옥 안에서 그에게 “어르신, 용서라니요. (중략) 어르신의 배려가 하늘을 감동시켰지만 저는 받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라며 편지를 보내왔다. 고씨가 보여준 편지에는 파란색 펜으로 단정하게 적어 내린 글씨로 “어르신께서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지 않으셔서 직접적으로 사죄드리지 못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어르신 앞에서 죽어드리고 싶고 그도 안 되면 제발 죽여줬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중략) 애써 모든 걸 감싸 안으시려는 어르신의 눈물 나는 안타까움이 그저 경이로워 제 눈시울만 적십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피해자 가족 고통 줄이기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유영철은 또 이 편지에서 ‘가족들이 계속 어르신을 찾아 어르신이 집에 계시는 줄 알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가족들은 어르신을 잊지 않았다는 걸 말씀드린다’며 사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어르신과 다시 아픈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아 만나는 건 사양한다’는 뜻도 밝혔다. 편지 말미에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뉘우치다 가겠다’고도 썼다.

고씨가 바라는 건 이 편지에서 유영철이 밝혔듯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그런 범죄자가 생기게 한 책임이 일정 부분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대신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 범죄와 처벌이라는 사법 체계 바깥에서 홀로 몸부림치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노력도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고씨가 푼푼이 모은 3000만 원을 ‘범죄 피해자 자녀 장학금’으로 내놓은 것도 그런 활동의 첫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릅니다. 내일 곧 목숨이 다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가족을 다시 만날 때 조금이라도 내가, 당신들 떠날 때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다 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가족을 다시 만날 때”를 이야기하다 끝내 눈시울을 붉힌 고씨의 마지막 말이다.



주간동아 2013.10.28 910호 (p14~17)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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