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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양영훈의 자연주의 캠핑

잊지 못할 낭만, 굴업도 하룻밤

자연생태계 잘 보존 ‘한국의 갈라파고스’…눈부신 풍광 ‘백패커 성지’ 자리매김

  • 양영훈 여행작가 travelmaker@naver.com

잊지 못할 낭만, 굴업도 하룻밤

잊지 못할 낭만, 굴업도 하룻밤

연평산 중턱에서 내려다본 코끼리바위와 목기미해변.

굴업도는 인천 앞바다의 덕적군도에 딸린 섬이다. 넓이 1.71km2(51만7200여 평)에 해안선 길이도 12km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서해의 진주’ ‘서해의 보물섬’ ‘한국의 갈라파고스’ 같은 수식어가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자연풍광이 수려하고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됐다는 이유에서다.

굴업도는 화산섬이다. 약 8000만~90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 화산분출로 생겨났다. 이곳에는 우리가 섬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백사장, 갯벌, 무인도, 간조육계도(토끼섬), 해안사구, 연륙사빈(목기미), 해안절벽, 주상절리, 해식와(海蝕窪), 초원, 숲, 습지 등 다양한 형태의 지형과 절경이 즐비하다. 파도와 바람과 소금기가 만든 자연유산이다.

언제부턴가 굴업도는 백패커(backpacker)의 성지(聖地)로도 불린다. 주말과 휴일뿐 아니라 평일에도 이 작은 섬을 찾는 백패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백패커는 백패킹(backpacking) 마니아를 가리킨다. ‘식량, 숙영(宿營) 장비, 취사도구 등을 배낭에 챙겨 직접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 이상 자연 속에서 지내는 행위’가 백패킹이다. 그 묘미와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왜 따뜻한 집을 놔두고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백패커를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조차 굴업도의 개머리언덕 초원에 텐트를 치고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거짓말처럼 백패킹 중독자가 되기 십상이다.

하룻밤의 낭만적인 캠핑을 꿈꾸며 굴업도로 가는 길은 멀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곧장 그곳까지 가는 배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쾌속선을 타고 덕적도로 가야 한다. 1시간 20분쯤 걸려 도착한 덕적도 진리선착장에서 다시 철부선 나래호를 타고 1~2시간쯤 더 항해해야 굴업도에 닿는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별로 지루하지 않다. 거북처럼 느릿하게 항해하며 이 섬 저 섬을 다 거쳐 가는 철부선에서는 사람의 마음조차 절로 느긋해진다. 눈앞의 바다 풍광도 한결 편안하게 다가온다.

굴업도의 하나뿐인 마을 큰말



11시 20분 덕적도를 출발한 철부선은 약 2시간 만에 굴업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비좁은 선착장은 손님을 마중 나온 민박집 주인들의 트럭과 육지로 나가려는 외지인들로 장바닥처럼 붐볐다. 민박집에 식사나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백패커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조붓한 숲길과 삭막한 시멘트도로를 20분쯤 걸어가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큰말은 굴업도에 하나뿐인 마을이다.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큰말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엄마 품처럼 아늑한 터에 자리 잡은 큰말에는 10가구 남짓한 주민이 산다. 외지 관광객이 몰리는 여름철에는 대부분 이곳에 살지만,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지는 겨울철에는 서너 가구만 남고 모두 뭍으로 나간다고 한다.

상주인구가 몇 안 되는 이 마을의 주민 사이에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존재한다. 굴업도 땅의 98% 이상을 사들인 CJ그룹 계열사의 개발 계획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뉜 것이다. 그래도 주민 대부분은 낯선 외지인에게도 친절하고 너그러운 편이다. 섬사람 특유의 배타심이나 경계심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다.

캠핑하려고 굴업도를 찾은 백패커는 십중팔구 개머리언덕으로 향한다. 개머리언덕으로 가려면 마을 앞 큰말해변을 가로질러야 한다. 굴업도에는 큰말해변을 비롯해 목기미해변, 붉은모래해변 등 모래해변 3곳이 있다. 그 가운데 큰말해변이 해수욕이나 캠핑을 즐기기에 가장 좋다. 마을과 가까운 데다, 넓고 단단한 백사장을 따라 울창한 솔숲이 형성돼 있다. 샤워장, 화장실, 급수대 같은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큰말해변에 도착했을 때 마침 썰물 때라면 토끼섬부터 둘러봐야 한다. 소굴업도라고도 부르는 토끼섬은 큰말해변의 동남쪽에 위치한 무인도다. 옛날에 주민들이 토끼를 방목했다는 이 섬은 바닷길이 열리는 썰물 때만 건너갈 수 있다. 토끼섬에 가면 해식와라는 독특한 해식지형을 볼 수 있다. 억겁의 세월동안 쉼 없이 밀려든 파도가 해안절벽의 옆구리를 움푹 파놓았다. 그 안쪽에서는 아무리 세찬 비가 퍼부어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다. 좁고 긴 회랑(回廊) 모양으로 생긴 이 해식와는 길이 120m, 높이 3~5m에 이른다.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형태의 해식지형인 데다 학술적 가치도 높아 2010년 4월 천연기념물 지정을 예고하기도 했지만 옹진군과 일부 주민의 반대로 끝내 무산됐다.

잊지 못할 낭만, 굴업도 하룻밤

1 굴업도 최고 절경으로 손꼽히는 코끼리바위. 2 형형색색의 텐트가 설치된 개머리언덕의 새벽 풍경. 백패커들이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다. 3 설악산 계류처럼 물빛이 깨끗한 큰말해변. 바로 앞에 토끼섬이 떠 있다.

다양한 동식물 서식 생태계 보고

토끼섬을 둘러본 뒤 다시 큰말해변을 가로질러 개머리언덕으로 향한다. 큰말해변의 서쪽 끝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10분쯤 가면 완만한 능선 길에 올라선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바람이 시원하고 전망도 상쾌하다. 방금 지나온 큰말해변과 토끼섬뿐 아니라 덕적도, 문갑도, 각흘도, 백아도 등 덕적군도의 여러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500m가량 떨어진 소사나무숲 아래까지 능선은 온통 수크령 군락이다.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수크령은 마치 이리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낭미초(狼尾草)라고도 부른다. 언뜻 보면 강아지풀 같지만, 길쭉한 타원형의 이삭 꽃차례가 강아지풀보다 몇 곱절이나 더 크다. 그런 수크령이 드넓은 초원에 가득한 풍경은 은빛 억새 물결 못지않은 장관을 연출한다.

굴업도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가도 삽시간에 짙은 해무가 밀려들곤 한다. 바람에 실린 해무는 굴업도의 광활한 초원과 봉긋한 언덕을 먹구렁이가 담을 넘듯 슬금슬금 넘나든다.

먹구렁이는 굴업도의 깃대종(flagship species·특정 지역 생태계를 대표하는 동식물)으로 꼽힐 만한 동물이다. 옛날 사람들이 집안 수호신으로 여겼던 먹구렁이와 구렁이는 현재 환경부에서 멸종위기동물 2급으로 지정, 보호할 만큼 개체 수가 급감했다. 하지만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된 굴업도에는 지금도 먹구렁이가 서식한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은밀한 곳에 서식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천연기념물 제326호인 검은머리물떼새와 천연기념물 제323-7호인 매, 그리고 왕은점표범나비나 애기뿔소똥구리 같은 희귀 곤충도 굴업도의 주인이다. 소사나무, 팽나무, 이팝나무, 동백나무 등으로 울창한 굴업도의 숲은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굴업도는 ‘한국의 갈라파고스’ ‘생태계의 보고’ ‘원형의 섬’ 같은 수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개머리언덕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위치한 소사나무숲은 가파른 비탈에 형성돼 있다. 너비가 100m도 안 되는 이 숲을 지나면 다시 수크령 군락의 초원길에 들어선다. 한때 목장지대였던 개머리언덕 일대 초원은 이제 백패커의 쉼터이자 사슴들의 삶터가 됐다. 굴업도에는 사슴이 많다. 한때 주민들이 방목했던 꽃사슴이 야생화한 것이다. 이제는 200마리를 헤아릴 정도로 개체 수가 불어난 덕에 굴업도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띈다.

잊지 못할 낭만, 굴업도 하룻밤

4 개머리언덕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꽃사슴. 털갈이가 한창인 봄철에 촬영했다. 5 서인수 씨 댁의 푸짐한 백반.

개머리언덕은 사방으로 거침없이 열린 개활지(開豁地)다. 바람은 피할 수 없는 대신, 탁월한 조망을 누릴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죄다 내 것이다. 황홀한 해넘이와 장엄한 일출,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밤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어화(漁火)까지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 굴업도를 찾는 백패커가 여러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에 텐트를 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수많은 캠퍼가 머물렀던 곳인데도, 개머리언덕은 의외로 깨끗한 편이다. 밤새도록 고기 굽고 술 마시며 고성방가를 서슴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긴 하지만, 백패커는 대부분 개머리언덕의 바람과 풍경을 조용히 즐기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발길을 되돌린다.

굴업도는 개머리언덕에서 하룻밤 캠핑만 즐기고 오기엔 너무 아쉬운 곳이다. 원래 이 섬은 개머리언덕, 큰말해변이 있는 서섬과 연평산, 덕물산, 코끼리바위 등이 있는 동섬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지금은 목기미해변이라는 연륙사빈(連陸沙濱)을 통해 하나로 이어졌다.

목기미해변 끝 동섬 초입에는 6·25전쟁 당시 피난민이 정착해 만든 작은 마을이 있었다.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굴업도에는 민어파시가 열렸다. 당시 파시가 열리면 배 수백 척과 어민, 상인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작부와 유흥주점도 많아 관할 부천경찰서에서 일본인 순사를 파견해 치안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마을이 엄청난 해일에 휩쓸려 폐허로 변했고, 민어 어획량마저 급감하자 더는 파시가 열리지 않았다. 지금은 목기미해변의 긴 백사장을 따라 늘어선 전봇대와 마을 터에 덩그러니 남은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가 옛 시절의 영화를 말해준다.

최고의 천연전망대 연평산 정상

동섬 연평산(123m)에는 굴업도 최고의 천연전망대가 있다. 그곳에 올라서면 동섬과 서섬을 잇는 목기미해변, 굴업도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코끼리바위, 굴업도 최고봉인 덕물산(125m)과 붉은해변이 오롯이 시야에 들어온다. 목기미해변에서 연평산 정상까지는 왕복 2시간쯤 걸린다. 연평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코끼리바위를 반드시 봐야 된다. 마치 사람이 조각한 것처럼 코끼리 엉덩이와 뒷다리 부위를 닮았다. 이 바위의 진면목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썰물 때에 맞춰서 찾아가는 게 좋다.

굴업도는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섬이다.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나 상사병을 앓게 마련이다. 어느 섬에서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자연풍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섬이 가진 많은 자연풍광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것이다. 그러므로 굴업도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야 한다.

잊지 못할 낭만, 굴업도 하룻밤

동섬 연평산을 오르는 길에 바라본 붉은해변과 에메랄드빛 바다.

여행정보

● 숙식

굴업도에는 전 이장인 서인수 씨 댁(032-832-7100), 장할머니민박(032-831-7833) 등 민박집 5~6곳이 있다. 식당은 따로 없다. 민박집에 미리 부탁하면 식사를 차려준다. 숙박료는 주중과 주말 구분 없이 5만 원, 식사비는 백반 7000원 선이다.

큰말해변의 샤워장, 화장실, 급수대 같은 편의시설은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캠핑하려고 굴업도를 찾은 사람은 1인당 1만 원의 쓰레기 수거비를 내야 한다.

● 가는 길

인천→덕적 : 케이에스해운(032-887-2705)의 쾌속선인 스마트호와 코리아나호가 평일 2회(09:00, 15:00) 운항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케이에스해운의 스마트호와 고려고속훼리(1577-2891)의 코리아나호가 3회(08:20, 09:00, 16:00) 왕복 운항한다. 1시간 20분 소요, 2만3750원.

덕적도↔굴업도 : 차량 선적이 가능한 철부선인 나래호가 평일에는 하루 1회(11:20), 주말에는 하루 2회(10:20, 13:40) 운항한다. 홀숫날은 오전 11시 20분 덕적도 진리선착장을 출발해 문갑도~굴업도~백아도~울도~지도~문갑도를 거쳐 다시 덕적도로 돌아온다. 짝숫날은 운항 방향이 반대로 바뀐다. 소요시간도 홀숫날에는 약 1시간, 짝숫날에는 약 2시간 걸린다. 요금은 7500원.

잊지 못할 낭만, 굴업도 하룻밤
양영훈은 여행작가다.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이 협회 대외협력이사를 맡고 있다. ‘아름다운 바다여행’ 등 저서 11권을 펴냈고, 총 6종의 초중 교과서에 여행기와 사진이 실려 있다.



주간동아 2013.09.30 906호 (p58~60)

양영훈 여행작가 travelmak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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