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0

2013.06.03

“조세피난처는 시한폭탄!”

투자회사 대표 A씨 “대한민국 0.1% 광범위하게 이용, 사라지지 않을 것”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3-06-03 0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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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피난처는 시한폭탄!”

    5월 22일 오후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언론노조 대회의실에서 ‘뉴스타파’의 김용진 대표(왼쪽)와 최승호 PD가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국내 인사를 공개하고 있다.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가 해외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을 차례로 공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3회에 걸쳐 발표한 명단엔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부부,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 조용민 전 한진해운홀딩스 대표이사, 조민호 전 SK케미칼 부회장과 부인 김영혜 씨, 이덕규 전 대우인터내셔널 이사, 유춘식 전 대우 폴란드차 사장 등의 이름이 포함됐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조세피난처로 유입된 금액은 약 889억 달러로 추산된다. 또 재벌 전문매체 ‘재벌닷컴’은 30대 그룹 계열사 가운데 231개 사가 조세피난처로 분류된 국가나 지역에 있다는 추측을 내놨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조세피난처를 이용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어떤 경로를 거쳐 조세피난처를 이용하고, 그 목적은 무엇일까. ‘주간동아’는 이 같은 의문점을 해소하려고 조세피난처 이용 경험이 있다는 투자회사 대표 A씨로부터 조세피난처 이용 방법과 이점, 그리고 조세피난처 이용의 위험성에 대해 들어봤다. 신원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인터뷰에 응한 그는 외국계 투자회사에서 최고경영자(CEO)로 활동 중이며,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이른바 ‘해외파’ 금융인이다.

    가장 큰 목적은 오너의 개인 자금 확보

    과거 버진아일랜드와 홍콩에 직접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조세회피를 한 경험이 있다는 A씨는 “재계 유력 인사 가운데 조세피난처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며 “단순히 조세피난처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캐는 것보다 이용 과정에 불법행위가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따져 죄를 묻는 게 합리적인 처벌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당사자들은 ‘재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많고, 그 절차도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들통이 나지 않을 만큼 치밀하기 때문이다.”

    A씨는 이번에 밝혀진 명단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며 조세피난처를 이용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세피난처의 VIP는 대기업 오너 일가와 전문경영인, 거물급 정치인이지만 그 외에도 대기업 임원진, 중소기업 대표, 금융회사 관계자, 고소득 전문직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이 이용한다”고 전했다. 소득 면에서나, 사회적 지위 면에서나 명실상부 대한민국 0.1%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A씨가 설명하는 조세피난처 이용 이유는 직업군마다 다르다. 전문직이나 대기업 임원은 탈세, 정치인은 비자금 조성을 목적으로 하지만 대기업 오너 일가는 탈세부터 재산 증식, 경영권 확보, 비자금 조성 등 좀 더 복합적인 이유로 조세피난처를 이용한다는 것.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해외법인의 수입 일부를 조세피난처로 옮겨둔다. 모 그룹의 경우, 한때 해외법인의 모든 수입을 페이퍼컴퍼니로 돌려놨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니 국제적 규모로 비자금을 조성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합법적 거래를 몇 차례 거듭하면서 불법거래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서서히 페이퍼컴퍼니 계좌로 돈을 옮겨놓기 때문에 이 과정을 추적하는 일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국세청이 역외탈세 추적에 아무리 애써도 쉽게 밝혀낼 수 없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렇게 조성한 비자금은 해외 부동산이나 미술품 구매, 주가 조작, 상속세나 증여세 등 경영권 상속과 관련한 비용으로 사용된다. A씨는 “대부분 오너 일가의 개인 자금으로 쓴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단정했다.

    또 다른 목적은 탈세다. 주로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가 이에 해당한다. A씨 자신이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이유도 탈세에 있었다고 고백했다. 연봉이 오르면서 함께 올라가는 세금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편법적인 탈세 수단을 모색하던 그에게 조세피난처 이용 방법을 알려준 것은 모그룹의 2세 경영인이었다고 한다.

    “그 재벌 2세를 통해 오랜 기간 자기 집안의 일을 봐주는 홍콩 법무사 사무실을 소개받았고, 그 사무실을 통해 홍콩과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하나씩 만들었다.”

    그가 설명한 페이퍼컴퍼니 설립 과정은 간단했다. 먼저 홍콩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다음, 버진아일랜드 같은 조세피난처에 또 다른 페이퍼컴퍼니를 만든다. 물론 두 회사의 대표이사는 명의자가 다르고, 명의자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외관상으론 별개 회사가 된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A씨는 미국 국적을 가진 친구들을 각각 대표로 이름을 올렸는데, 만일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법무사 사무실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주기도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명단 폭로는 해답이 될 수 없어

    이와 동시에 한국에 그의 입김이 닿는 자회사를 만든 후 그 회사의 홍콩법인을 세워 자신의 이름을 ‘홍콩법인 소속 한국 주재원’으로 올렸다. 그럼 한국법인에서 지불하는 연봉이 홍콩 계좌로 입금돼 한국 소득세율을 적용받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여러 단계를 거친 돈이 버진아일랜드 페이퍼컴퍼니 계좌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중간 과정에서 신경 쓸 것이 많긴 하지만 소득세를 제대로 내는 것보다 싸게 먹혀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방법을 통해 단기간에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A씨는 아직도 조세피난처 이용이 세금 회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 답은 “아니다”였다. 본인 재산을 타인 명의로 돌려놓은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걸리면 어쩌나 싶은 걱정도 커 정신건강에 해로웠기 때문이다.

    “요즘엔 세계 각국에서의 금융거래 기록, 출입국 기록을 전산화해 정부가 발 벗고 나서면 못 찾을 게 없다.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던 스위스 은행도 미국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나. 세계적으로 조세피난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이는 만큼 언제가 됐든 조세피난처도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껏 머리 쓰고 발품 팔아 고생한 게 헛수고가 되면서 추징금으로 돈도 날리고 사업에도 차질이 생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망신당한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일에 집중하는 편이 속도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조세피난처를 통한 탈세를 하지 않는다는 A씨지만 버진아일랜드 페이퍼컴퍼니는 여전히 그대로 있다. “언제 들킬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보니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없애고 싶지만 사업하는 처지에선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사업을 하다 보면 합법의 영역을 넘어선 지출이 생기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거물급 정치인의 정치헌금 요구나 고위공직자, 사업상 필요한 로비스트들에 대한 커미션(정당한 요금 외의 보수) 등 국세청엔 ‘말 못할 지출’을 해결하려면 페이퍼컴퍼니가 필요한 게 현실이다.”

    A씨는 끝으로 “요즘 같은 (조세피난처 계좌 소유주에 대한) 폭로는 확실히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지만 폭로된 것 외의 ‘검은 돈’을 양지로 꺼내는 효과는 미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기업들이 좀 더 깊은 곳으로 돈을 숨길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일정 기간을 정해두고 그 기간 안에 신고하면 추징금을 감면하거나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등의 혜택을 주는 게 지하자금 양성화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소득세, 법인세를 현실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고소득자의 소득세를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다른 금융 허브 수준으로 낮추면 편법을 쓸 일도 없고 오히려 일본, 중국 등 해외 고소득자나 기업이 앞장서서 한국법인을 만들려고 들 테니 세수 확대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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