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4

2013.04.22

‘40대 여성 주당’ 늘고 있다

애 컸겠다, 여유 있겠다 홀짝홀짝…취미 없으면 술독에 쉽게 빠져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3-04-22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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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여성 주당’ 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거주하는 이지연(가명·41) 주부는 매일 밤 술을 마신다. 이유는 다양하다. 저녁식사 반주로도 마시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즐기기도 한다. 남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날도 있고, 남편과 아이들을 재운 후 혼자 TV를 보면서 마시기도 한다.

    술을 마시다 보니 가족과 갈등도 잦아졌다. 평소 학부모 모임에서 현모양처 사모님으로 통할 정도로 정숙하고 단정한 이미지를 지닌 그이지만, 술만 마시면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욕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음주에 대해 잔소리하는 친정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주정을 하는 등 태도가 돌변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이씨의 장녀는 “엄마가 술을 마시고 하는 욕은 평소 엄마가 우리에게 쓰지 말라는 것들뿐”이라고 고백했다. 남편도 “마시지 말라고 하면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말리지는 못하지만 못마땅한 건 사실”이라며 이씨의 음주습관에 불만을 털어놨다.

    남성호르몬 증가해 폭음·주정 심해져

    이씨가 밤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다. 남편이 승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둘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한시름 덜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친구들이나 친척들은 입을 모아 이씨 팔자를 부러워했다. 이씨 스스로도 “나 정도면 아무 문제없이 행복한 인생을 보낸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조금의 불만도 없는 생활이었다. 그런데도 점점 술에 빠져드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여성의 알코올의존증은 예전부터 문제가 돼왔다. 이른바 ‘키친 드렁커(Kitchen Drunker·부엌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여성)’다. 키친 드렁커의 특징은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나간 직후인 오전에 혼자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식구들이 귀가하기 전 술을 깨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이씨의 음주습관은 키친 드렁커와는 사뭇 다르다.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저녁시간에 술을 마시고, 가족이 집에 있는데도 술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저녁 모임에 나가는 당당함은 가족에게 들킬까 봐 불안해하며 낮시간에만 집 안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키친 드렁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또한 키친 드렁커 대다수가 경제적 어려움이나 부부문제 등 심각한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달리 이씨에게는 큰 고민이 없다. 단지 술이 좋다는 이유뿐이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의원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최근 들어 40대 전후 여성이 술에 빠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예전엔 생활고나 부부갈등 등 현실적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수단으로 술을 택하는 전업주부가 많았지만, 요즘엔 아무런 문제나 고민 없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 원장은 그 이유로 “생활의 여유와 호르몬의 변화”를 들었다. 40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드는 시기다. 아이들도 유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이라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간다. 이처럼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늘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과장으로 일하는 워킹맘 전윤정(가명·43) 씨도 40대에 접어들면서 술에 빠진 경우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을 둔 그는 “전에는 꼭 참석해야 하는 회식자리에 얼굴 도장만 찍고 바로 일어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엔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발 벗고 나서서 술자리를 만들 만큼 술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남편이나 아들한텐 술 마시고 간다고 당당히 얘기한다. 아들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엄마보다는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좋아하는 듯해 마음 편히 술자리를 갖는다. 또한 지금까지 내가 바깥 활동을 참고 아들과 집안일을 챙겼으니 이제부터는 남편이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40대 여성이 술에 빠지는 건 아니다. 손 원장은 “취미 등 몰입할 대상이 없는 여성이 음주습관을 들이게 된다”고 전한다. 20~30대에는 익숙지 않은 살림과 가계 불안, 자녀 양육 등으로 숨 가쁘게 생활하다 40대 무렵 자녀의 성장과 경제력 향상 등으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주부에겐 비로소 자신만의 시간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평소 가족 중심의 생활을 해오던 주부는 혼자만의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가장 쉽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혼자, 혹은 친구들과 갖는 술자리가 된다는 얘기다.

    적당히 즐겁게 마시면 좋은 위안

    40대에 들어서면서 여성호르몬 분비가 줄고 상대적으로 남성호르몬 분비가 늘어나는 것도 음주 패턴을 변화시키는 한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폭음 습관이 적고 폭행, 폭언 등의 폭력적인 주정을 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40대 이후 여성 음주자는 남성 못지않게 폭음을 하고, 목소리가 커지거나 욕을 하며, 주변에 싸움을 거는 등 주정이 심해진다고 한다.

    문제는 음주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손 원장은 “남성호르몬 증가로 술과 성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다”면서 “도덕성에 대한 규제도 약해지기 때문에 폭음이나 주정에 대해서도 관대해지고 불륜에 대한 죄의식도 약해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구 주엽동의 강미경(가명·42) 씨는 술자리에서 만난 남성과의 불륜으로 이혼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 있다.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또래 엄마들과 몇 차례 술자리를 가졌는데, 우연히 합석하게 된 남성 가운데 한 명과 깊은 관계에 빠진 것이다. “처음엔 즐겁게 술만 마시는 관계였는데, 어느 날 만취 상태에서 실수를 하면서 관계가 깊어졌다”며 “결국 1년 정도 관계를 유지하다 남편에게 들켜 이혼 얘기가 오갈 정도로 큰 문제가 됐다”고 털어놨다.

    폭음 습관으로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알코올중독치료 전문병원인 행복한병원 관계자는 “여성은 남성보다 음주로 쉽게 건강이 손상되기 때문에 폭음이나 지속적인 음주습관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체지방이 많고 체액과 수분이 적으며 간에서 분비되는 알코올 분해효소도 적어 여성 음주자는 남성보다 뇌, 췌장 등의 손상 정도가 심하고 생리통, 조기폐경, 유방암, 부정맥 등의 질병에 노출될 위험도 높아진다. 여성호르몬과 부갑상샘호르몬 분비에도 이상이 생기는 것은 물론, 체내 칼슘 농도가 낮아져 골다공증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이 같은 음주 폐해는 폐경기를 앞둔 40대 여성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폐경기 전후에 나타나는 칼슘 농도 저하와 호르몬 분비 이상에 가속도가 붙는 것이다.

    손 원장은 “적당히, 즐겁게 마신다는 전제 하에서 즐긴다면 술은 40대 여성에게 둘도 없이 좋은 위안이자 취미생활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40대 여성 주당이라면 이 같은 ‘적당히, 즐겁게’라는 단서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유쾌하게 시작한 술자리가 유쾌하게 끝날 수 있게 하는 건 오로지 술을 마시는 사람의 자제심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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