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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난징대학살과 평화의 이중주

잔혹한 국가 범죄 역사적 현장…주변국과 항구적인 평화 연대 구축을

  •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한국근현대사

난징대학살과 평화의 이중주

한국인은 대부분 중국 난징에 있는 ‘침화일군남경대학살우난동포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虐殺遇難同胞紀念館)’을 ‘난징대학살기념관’이라고 부른다. 최근 이곳이 새삼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지난해부터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영유권 갈등을 계속하는 가운데 1월 17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을 방문해 학살 피해자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묵념했다. 이어 “난징대학살 같은 참혹한 사건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며 “일본인으로서 마땅히 책임을 느끼고 충심으로 사과를 표한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난징에 오기 직전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정치인들에게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중·일 간 영유권 분쟁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인정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에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방위상은 하토야마 전 총리를 “국적(國賊)”이라며 비난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본군 만행

난징대학살에 관한 하토야마 전 총리의 발언은 일본 우익과 일부 보수 세력 처지에서는 환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 우익과 일부 보수 세력이 편찬한 역사교과서에서는 난징대학살과 관련해 “희생자 수 등 실태와 관련해 자료상에서도 의문점이 제기됐고, 견해가 다양해 현재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기술하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중국인 약 30만 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난징대학살기념관 정문 뒤 중산문(中山門)에는 ‘논의 여지가 없는 확정적 수치’라는 의미에서 ‘300,000’이란 숫자까지 조각해놓았다. 그러나 일본은 희생자 수가 50명 이하라는 의견에서부터 10만,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는 의견까지 그 견해가 다양하다. 난징대학살이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난징에서 1937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1월경까지 중국 군인과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숫자의 부정확함을 지적하고 학살 규모를 축소한다 해서 일본 우익과 일부 보수 세력의 ‘물 타기’가 성공할 수는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전후 난징군사법정 기초조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중국군과 난징 시민을 시내, 근교에서 집단 혹은 분산 방식으로 28차례 이상 19만 명 넘게 학살했다. 여성이라면 나이 불문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갖은 수단을 동원해 강간했다. 생존자 청루이팡은 자신이 목격한 사건을 1937년 12월 18일자 일기에 다음과 기록했다.



“정말 지독하다. 일본군들은 단단히 미쳤다.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강간하고 싶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강간한다. 어떤 모녀는 모두 과부인데 60세가 넘은 어머니는 군인 3명에게 연달아 강간당했고, 40대 딸은 군인 2명이 강간했다. 정말 인간도 아니다. 우리는 기진맥진했다. 목이 다 쉬었다.”

일본군 만행이 즉각 일본 사회에 알려진 것은 아니다. 패전 후 열린 전범재판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이 불거졌지만, 일본 사회에서 크게 문제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통해 전후 보상 부담에서 벗어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을 이어갔고, 일본 사회에서는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주장이 제기됐다.

중국에서는 교과서에 간략하게 사실을 기술하고, 난징 지방 차원에서 책을 발간하거나 증언을 채록하는 정도가 다였다. 1945년 승전 직후 국공 내전이 있었고, 49년 사회주의정권 수립 후 한국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건설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66년부터 10년 동안은 문화대혁명이란 대혼란을 겪어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일을 살펴볼 여력조차 없었다.

더욱이 1972년 일본과 수교한 후 경제적 교류가 급했던 중국 처지에선 과거사 문제를 정면에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 침략을 용인할 수 없지만, 침략은 일부 군국주의자가 범한 것이지 일반 국민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예전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훗날 스승이 된다”고 말했지만, 국가 차원에서 난징대학살을 기억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은 벌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2년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검정 문제가 불거지면서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침략을 진출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검정을 지도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려 들자 한국과 중국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외교 문제화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 스스로 ‘근린제국조항’이란 항목을 검정심사에 적용하겠다고 밝히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듯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은 그 일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과 지배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독립기념관을 세운 계기도 바로 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이었다. 중국에서도 이때를 기점으로 항일전쟁이나 일본의 침략과 관련한 수많은 시설을 세웠다.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은 물론, 일본군 범행을 폭로하는 기념관이 100여 개나 생겼는데 난징대학살기념관도 그중 하나다.

최고 상징적 전쟁기념관

중국은 ‘피로 얼룩진 역사를 영원히 난징 대지에 새겨두자’는 취지를 내세우며 항일전쟁 승리 40주년인 1985년 2월 15일 난징대학살기념관을 개관했다. 기념관이 자리 잡은 장둥먼(江東門)은 난징 시내에 있는 집단학살 장소 13개소 가운데 하나다. 이곳에서 1937년 12월 16일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약 1만 명이 기관총으로 살해됐다. 장둥먼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장소성과 역사성을 온전히 담은 공간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 이처럼 현장성을 살려 역사화한 기념관이 거의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부럽기까지 하다.

훗날 덩샤오핑은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우호만을 강조하고 제국주의, 식민주의, 패권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역사에 대해서는 되새기지 않았다. 최근 일본이 교과서를 수정해 역사를 왜곡한 것이 우리에게 역사를 되새기고 인민을 교육시키는 기회가 됐다”고 고백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이후 1997년과 2007년 12월 각각 난징대학살 60주년과 70주년을 맞아 두 차례 확장했다. 기념관 확장에는 일본 역사인식과 중국 내부 사정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연착륙하는 듯하던 중국 개혁개방은 1989년 톈안먼사태라는 민주화운동에 직면했다. 이 사건은 사회주의 이념이 중국인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한다는 현실을 확인시켜줬다. 1990년대 들어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애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항일전쟁 관련 기념관은 그에 부합하는 공간이었다. 더구나 제3차 공사 도중 희생자 완전 유해 19구를 발굴하는 등 증거가 명백함에도 일본 우익과 일부 보수 세력은 여전히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중국을 자극했다. 1997년 일본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결성해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왜곡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시하라 신타로 일본 도쿄도지사처럼 “난징대학살은 날조된 것”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일본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늘어났다. 이에 중국은 난징대학살기념관을 ‘세계 일류, 국내 최고의 국가 상징적 전쟁기념관’으로 만들려고 확장을 시도했다.

확장된 기념관은 전쟁, 살육, 평화라는 주제어로 공간을 재배치했다. 일본 침략과 잔혹 행위가 있던 현장을 가감 없이 드러낸 ‘전쟁기념관’에 평화를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그러나 기념관 전시공간은 침략전쟁을 드러내는 데 더 치중할 뿐, 주변국과의 연대를 통해 평화로의 상승적 전환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 점은 한국 독립기념관도 마찬가지다.



주간동아 2013.01.28 873호 (p50~51)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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