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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문으로 망가진 내 인생 털어놓으니 가슴 후련

국가 폭력 공개증언 매달 한 번씩 ‘마이 데이’로 상처 치유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고문으로 망가진 내 인생 털어놓으니 가슴 후련

최근 영화 ‘남영동 1985’가 개봉한 뒤 고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부당한 이유로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고문 피해자들이 치유를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들른다는 곳을 방문해 그들의 현재를 들여다봤다.

12월 3일 오후 7시 서울 은덕문화원. 달빛이 드리워진 한옥 앞에 신발 30여 켤레가 놓였다. 문을 열자 고문 피해자와 가족, 정신과 의사, 변호사, 자원봉사자들이 앉아 ‘마이 데이(my day)’를 기다리고 있다. 고문 피해자가 주인공이 돼 자기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치유를 시도하는 이 모임은 2010년 11월부터 매달 한 번씩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문 피해자들이 치유 모임을 갖는 곳은 광주트라우마센터(보건복지부와 광주시가 공동 운영하는 국가폭력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한 치유센터로 올해 10월 개소)와 진실의힘(군사독재정권 시절 고문을 당한 뒤 허위자백으로 간첩이 된 피해자들이 국가배상금의 일부를 내놓아 2009년 설립한 재단법인)뿐이다.

오늘 주인공은 최양준(73) 씨. 그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로 1982년 김해공항에서 체포돼 부산보안대와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은 뒤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1년 가석방됐으며, 지난해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마이 데이’는 그를 소재로 한 동영상이 상영되고, 그가 청중에게 꽃다발과 박수를 받으며 시작됐다.

문요한 정신과 의사 안녕하세요.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공개 증언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어내자는 자리인데요. 낯선 사람에게 고문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용기가 많이 필요합니다. 최 선생님, 그동안 ‘마이 데이’ 주인공을 사양한 이유는 뭔가요.



고문으로 망가진 내 인생 털어놓으니 가슴 후련

최양준 씨(오른쪽)가 문요한 정신과 의사에게 고문 피해 사실을 털어놓고 있다.

# 대바늘로 손톱과 살 사이 찔려

최양준 제가 좀 불행하게 살았어요.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계모 밑에서 구박받으며 살았죠. 초등학교 겨우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고, 기왕이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돈벌이가 좋다는 일본에 갔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여권이나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죠. 1975년 1개월 관광비자로 일본에 들어가 불법체류를 했어요. 한국에 가려고 하니 사장이 붙들면서 일본인 여권을 만들어줘 그걸 들고 다녔어요. 그러다 1982년 붙잡혀 강제 송환돼 김해로 왔고, 부산보안대로 갔죠. 25일 동안 반복적으로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을 하고 전깃줄을 하나는 성기에, 하나는 손가락에 묶은 뒤 전기고문을 하면서 자백하라고 했어요.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대바늘로 손톱과 살 사이의 비좁은 틈을 꾹꾹 찌르는 거였는데, 세 번인가 까무러쳤고 이러다 처자식도 못 보고 죽겠다 싶어 도망쳤어요. 보안대 담 위 철조망을 넘다 보니 발바닥 한복판에 죽창 같은 것이 꽂혀 피가 줄줄 났죠.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 거울을 봤는데, 어찌나 따귀를 맞았던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더라고요. 이 몸으로 어떻게 도망갈까 싶어 되돌아갔어요.

문요한 뾰족한 것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최양준 철조망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고기 잡을 때 쓰는 창살 같은 게 박혀 발바닥이 ‘빵꾸’ 나는 줄 알았거든요. 요즘에도 겨울이 되면 발바닥 가운데가 따끔거려요. 하도 많이 맞아서 탁구공만한 멍이 생겼다 없어지기도 하고요. 모두 제 팔자고 운명이겠죠. 고문을 받고 서울구치소에 가니까 얼마나 평온하던지, 지금 뭘 해도 그때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해요. 9년 만에 출소한 뒤 경찰이 동향조사를 해도 그저 운명이라고 여겼어요. 가장 억울했던 건 우리 마누라가 친척들에게 전화하면 “우리한테 연락하지 마라”며 배척한 일이에요. 배다른 제 동생도 면회 와서 “형님이 뭔가 잘못했으니 징역 사는 것 아니요”라고 하는데, 변명을 못 하겠더라고요. 서울 천호동, 명일동 수도도 안 나오는 데서 떡볶이 장사해 아들 셋을 키운 마누라한테 고맙죠. 들어갈 때는 애들이 초등학생이었는데 나오니 하나는 군대 가고, 둘째와 셋째는 고등학교에 다니더라고요. 우리 엄마가 나를 왜 낳고 돌아가셨을까. 차라리 낳지 않았더라면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 싶었어요.

문요한 선생님은 사모님께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최양준 이야기 안 했어요. 마누라가 서울구치소 갈 때 담요 한 장 밀어주더니 3~4년 동안 면회를 끊더라고요. 외롭게 살 팔자인가 싶어 화장실에서 많이 울었죠(눈물). 이혼을 요구할까 싶어 두렵기도 했고요. 마누라는 애들한테 말하지 않았더라고요.

# 아이들과 정이 들지 않는다

고문으로 망가진 내 인생 털어놓으니 가슴 후련

치유 모임에 참석한 고문 피해자들.

문요한 왜 말을 안 했을까요.

최양준 마누라는 애들이 쇼크를 받을까 봐 안 했다는데, 둘째가 중3 때 함께 면회를 왔다 가면서 “아버지가 조총련하고 일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나 봐요. 당시 반공의식이 확실해서인지 애들이 그런 아버지를 두고 공부하면 뭐하냐 싶어 방황한 것 같더라고요. 제가 나온 뒤 애들이 담배를 피우기에 혼내니 막내가 “아버지가 뭐 잘한 것이 있어요”라고 하는데…. 그때 이야기하면 눈물 나요. 제가 나오니까 마누라가 “당신 쓰고 싶은 대로 쓰라”면서 현금 3000만 원을 주는데,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마음대로 쓰겠어요. 제가 나온 뒤 마누라가 2년을 더 일했지만 그 뒤로 제가 일해 지금은 수유리 ○○아파트에서 잘 살고 있어요.

문요한 운명이나 팔자가 정해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최양준 그럼 마음이 좀 편안해지니까요. 대바늘로 손톱과 살 사이의 틈을 찌르는 건 짐승에게도 못할 짓이에요. 전기고문 당할 땐 정말 많이 울었어요. 차라리 죽어버려야겠다 싶어 제 손으로 목을 사정없이 눌렀는데도 죽을 수 없더라고요.

문요한 다른 분들 말씀으로 이어가지요. A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는데 어떠셨나요.

A 최 선생하고 감옥에서 함께 지내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안 했어요. 저는 지금도 고문 이야기를 하면 그 자체가 저를 고문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참석하는 것도 망설여지고요. 최 선생님이 울음을 터뜨릴 때, 저도 아팠습니다.

문요한 B 선생님은 기분이 어떤가요.

B 18년을 감옥에서 살다 나오니까 큰놈이 “우리 크는 데 아버지는 무슨 도움이 됐느냐”고 해 뺨을 때렸습니다. 아이들 쉬야도 시켜주고 뒤도 닦아주면서 정을 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지금도 정이 없어요. 이 모든 게 아들이나 제 탓은 아니겠죠.

C 저는 가족(고문 피해자)들이 고문당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재판에 증언자로 나선 고문 담당 경찰관이 “조사실은 특수시설이라 고문 소리가 안 들린다”고 했지만, 왜 안 들리겠어요. 문 열어두면 다 들립니다. 그 소리는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문요한 최 선생님,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니까 어떠세요.

최양준 다 공감이 가죠. 제 인생을 종합해보면 좋았던 일은 한 가지도 없고 밑바닥 생활만 해온 것 같아요.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왜 내가 걸렸을까, 팔자였나 생각해요.

문요한 그렇게 생각해야 고통을 견딜 수 있었겠죠. 진실의힘 활동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최양준 재판 과정에서 진실의힘을 알았어요. 저는 백도 돈도 없는 사람인데, 어찌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겠나 싶었지만 대법원에서 무죄가 입증됐어요. 다만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는데도 검사가 항소하니까 쇼크가 컸죠. 이런 과거사 사건에서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검사가 항소하는 경우는 제가 처음이라 하더라고요.

문요한 선생님의 남은 삶이 어떻게 흘러가길 원하세요.

최양준 건강해지면 좋겠어요. 비만 오면 온몸이 저려요. 애들을 대학까지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애들 중에 과장도 있고, 애들이 부모를 귀찮게 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평온해요.

문요한 선생님에게 가족이란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어떤 가정을 꿈꾸셨나요.

최양준 행복한 가정을 꿈꿨는데 서로 정이 없어 아쉬워요. 하긴 마흔이 넘은 애들이 부모한테 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요. 다만 제가 치매에 걸려 자식들에게 폐를 줄까 걱정이에요. 요즘에는 장모님을 자주 뵈려고 해요. 돌아가신 뒤 제사상에 진수성찬을 차려드리면 뭐하겠어요. 제가 없을 때 장모님이 많이 도와주셨는데, 96세인데도 막걸리, 돼지고기도 잘 드세요(웃음).

문요한 불행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아 보이는데요. D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어요.

D 고문은 그 자체만이 아니라, 당시 나 자신이 비굴했다는 사실이 남아 있는 거예요. 밤새 두들겨 맞고도 노래 부르라고 하면 노래 불렀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하지만 ‘마이 데이’를 하면 나약함이 해소돼요. 오늘 주인공 최 선생은 귀감이 되는 인재 중 인재예요.

최양준 뭐가 먹고 싶어 그런가(웃음).

청중 돼지 한 마리 잡으소(웃음).

# 고문 가해자 처벌해야

고문으로 망가진 내 인생 털어놓으니 가슴 후련
E 저도 ‘마이 데이’를 마친 뒤로 1개월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꾸던 고문 꿈을 안 꿔요.

F 최양준 선생을 만나면서 출소 후 18년 만에 처음으로 고문에 대해 말했어요. 고문받을 때 고문하는 사람들이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이선희의 ‘J에게’가 흘러나왔는데, 교도소에서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귀를 막고 싶었죠. 지금도 좀 그렇고. ‘남영동 1985’ 영화를 보니까 그때 생각이 나서 못 보겠더라고요. 저는 엘리베이터 고문까지 당했어요. 그 애들은 사람이 아니에요. 5, 6명이 집단적으로 저를 폭행했는데….

문요한 F 선생님은 이제 힘들지 않으세요. 네… 다행입니다. G 선생님은 어떠세요.

G 진실을 규명해야 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이뤄져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팔자 탓을 하는 겁니다. 고문한 수사관, 검사, 판사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요. 사죄는 가해자의 의무입니다.

H 어떻게 그자들 가운데 한 명도 제 발로 나오지 않는지…. (떨면서) 재판을 진행하면서 저를 고문한 사람이 증인으로 나왔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떨려서 죽겠더라고요. 저놈을 잡아야 하는데 재판 끝나고 그냥 빠져나가니…. 그 사람이 ○○시에 산다는 것만 압니다.

문요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선생님들 생각도 궁금한데요.

역사가 모진 세월을 견딘 최 선생님의 힘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양준 가족이 있었으니까요. 그 힘이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최양준 담당 변호사 선생님 주변에 가족뿐 아니라 선생님 손을 잡아주는 분이 있어 버티신 게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 장모님께서 선생님을 신뢰하셨다 하고,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떡볶이가 안 팔려 생계가 어려울 때 어떤 분이 영업비밀을 알려준 덕에 장사가 잘됐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오신 분들도 할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민사재판 항소심 준비 잘해서 국가배상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학생 우리나라를 응원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이 사실이 많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고문 피해자 아들 아버지가 제가 고2 때 (감옥에서) 나오셨는데, 그때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대학 다니면서 독립한 뒤로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 와서 말씀도 듣고, 이번에 개봉한 영화를 보면서 (울먹임) 역사를 알게 됐습니다. 아직도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노력하겠습니다.

최양준 아들과 한라산에 가려고 해요. 저도 그렇지만 아들도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때 아들하고 사진을 찍어야죠. 아들과 단둘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거든요.

문요한 오늘 자녀분이 오시면 좋았을 텐데요.

최양준 우리 애들은 바쁘기도 하고, 멀리 살기도 해서요.

문요한 선생님, 마지막으로 정리 말씀을 해주시겠어요.

최양준 세상은 법적관계만이 아닌, 인간관계와 정으로 얽혀 있다고 해요. 앞으로 우리도 정으로 잘 어울려 살아가면 좋겠어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간동아 2012.12.10 866호 (p40~42)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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