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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기획 | 명사들이 말하는 농촌 ⑤

“축산인은 생산에만 전념 농협은 글로벌 축산유통그룹 만든다”

남성우 농협 축산경제 대표이사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축산인은 생산에만 전념 농협은 글로벌 축산유통그룹 만든다”

“축산인은 생산에만 전념 농협은 글로벌 축산유통그룹 만든다”

● 1951년 경기 안성 출생● 1969년 경동고 졸업● 1972년 서울대 축산과 졸업● 2002년 건국대 축산경영학 박사 ● 농업경제기획실장, 농협유통 대표이사 역임

남성우(61) 농협 축산경제 대표이사의 어릴 적 꿈은 목장주인이었다. 초등학생 때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이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유럽의 한 목장 사진이었다. 그는 넋을 놓고 사진을 보던 그 시절 기억의 한 토막을 지금도 꼭 부여잡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그는 소를 키웠다.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던 부친이 송아지 한 마리를 사와서는 “성우야, 이게 네 소다. 잘 키워봐라”고 말했단다. 그때부터 남 대표는 소를 친구 삼아 살았다.

“어린 시절 꿈은 목장주인”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외양간으로 뛰어갔어요. 소 등을 긁어주고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죠. 물도 주고 풀도 주고…. 무척 잘 자랐어요. 새 볏짚을 깔아주면 소가 아주 좋아했어요. 소가 좋아하는 걸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요.”

소를 키우면서 남 대표는 바빠졌다.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풀을 베어다 먹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집어던지고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쓱쓱 비벼먹고는 낫 두 자루를 들고 지게 지고 집을 나섰다. 풀을 한 짐 베어 돌아오는 데는 3시간 정도가 걸렸다. 겨울이 되면 열심히 쇠죽을 쑤어 먹였다. 볏짚에 쌀겨와 콩깍지, 고구마 줄거리 말린 것을 넣은 뒤 한 두 시간씩 휘휘 저어가며 ‘친구’ 먹일 밥을 정성스레 만들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네 고등학교 입학금 댈 소다. 잘 먹여라”며 등을 두드렸다. 남 대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주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내 미래가 달린 소다”라는 말을 되뇌었다.



경기 안성이 고향인 남 대표는 경동고와 서울대 축산학과를 나왔다. 1975년 농협에 입사했고 2002년 건국대에서 축산경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남들처럼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고등학생 때도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목장주인이라고 대답했어요. 법대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죠. 내가 남들보다 농촌에 대해선 잘 아니까, 당연히 크면 목장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 부모님 반대는 없었나요.

“자식이 공부를 잘했는데도, 부모님은 ‘법대 가서 판검사 해라, 의대 가라’ 뭐 그런 소리를 일절 안 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참 희한한 분들이죠. 오히려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너 왜 농대에 가려고 하느냐’며 말렸어요. 공대 가라면서. 그래도 나는 농대 간다고, 그것도 축산을 공부하겠다고 우겼죠.”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남 대표는 농협 시험을 봤다. 목장주인을 꿈꾸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남 대표는 “꿈도 꿈이지만 당시 농협이 일반 공무원보다 월급이 많았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1975년 농협에서 처음 발령받은 곳은 평택군조합이었다. 조합에서는 그를 예금계로 보냈다. 지금으로 치면 은행창구 업무였다. 그런데 그는 당시만 해도 하늘 같던 조합 전무이사를 찾아가 “못하겠다”고 버텼다.

“출근했는데, 전무이사가 나를 부르더니 ‘어이, 남 서기는 출납계로 가’ 그러는 거예요. 나는 못 간다고 했죠.”

▼ 왜 그랬나요.

“농대 축산과 나온 놈이 무슨 출납을 하겠어요. 이게 돈을 정확히 세야 하는 일이라 어렵잖아요. 그래서 전무이사에게 그랬어요. ‘나는 주판도 못하고 돈도 잘 못 센다. 그러니 나에게 그 업무를 맡기면 분명 사고가 난다. 그래도 시킬 거냐’라고. 그랬더니 전무이사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래도 사고가 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구매계로 다시 발령을 내줬어요. 경운기, 비료, 농약 같은 걸 농민에게 파는 일이었죠. 당좌계에서도 일했는데, 그때 나는 당좌수표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었어요(웃음).”

구매계와 당좌계에서 일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농장에 가 있었다. 게다가 그가 일하던 평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농협이 관리, 운영하는 안성농장(현 농협안성팜랜드)이 있었다. 그는 주말마다 안성농장으로 놀러가 소들과 놀고 밥도 얻어먹었다. 그러다 안성농장에 자리가 비었다는 연락을 받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옮겼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농장으로 가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안성농장으로 오면서 축산과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어요. 드디어 나에게 목장이 생긴 거죠. 안성농장의 원래 이름은 ‘한독낙농시범농장’이에요.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해 뤼브케 대통령에게 부탁해 만든 농장이었죠. 박 대통령은 당시 가난을 없애는 데 축산만한 게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뭘 도와주면 좋겠느냐’는 서독 대통령의 말에 ‘농장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한 거예요. 농협이 땅을 사고 건물이나 장비는 모두 서독에서 가져와 만든 농장이었죠. 서독에서 제일 좋은 기계를 들여왔어요. 풀 베는 기계, 풀 뒤집는 기계, 땅 파는 기계, 트랙터 등이 다 벤츠 이런 거였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선 보지도 듣지도 못한 장비를 많이 들여왔죠. 주말마다 다니면서 구경할 만했어요. 소는 캐나다에서 200마리 들여왔고요.”

안성농장은 1969년 10월 개장했다. 48만㎡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국립종축원(현 국립축산과학원 축산자원개발부)에서 운영하는 종축장이 충남 천안 성환에 있었는데, 규모와 장비로는 안성농장을 따라오지 못했다. 안성농장 개장식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참석했다.

안성농장으로 발령받은 남 대표는 젖소 생육을 책임지는 업무를 맡았다. 매일 아침 4시 30분쯤 일어나 하루 종일 소와 뒤엉켜 살았다. 2인 1조로 나눈 인부들이 각각 50마리씩 맡아 젖을 짜고 밥을 주고 소를 씻긴 뒤 초원으로 내보내는 일을 관리 감독했다. 말 그대로 카우보이였다. 남 대표는 그곳에서 일한 5년간 인공수정, 분만처리 등 소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다.

“어지간한 돌팔이 수의사보다 낫다”

“내가 수의사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돌팔이 수의사보다는 낫다고 자부해요. 거기서 내 꿈의 절반은 이룬 셈이죠. 안성농장에서 나온 우유는 전량 서울우유로 보냈어요. 그리고 젖소를 지역 축산농가에 2~3마리씩 분양했죠. 안성농장을 중심으로 축산지대가 점점 늘어난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국립종축장 때문에 천안 성환이 낙농지대가 되고, 한독농장(안성농장) 때문에 안성이 낙농지대가 되고, 한뉴(한국-뉴질랜드)목장이 들어서면서 평택이 낙농지대가 됐어요. 우리는 그 세 곳을 ‘낙농트라이앵글’이라고 불렀죠. 지금도 이곳은 우리나라 축산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요.”

안성농장에서 5년을 보낸 뒤 남 대표는 서울로 올라왔다. 1981년 축협이 농협에서 분리될 때도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축협으로 갔다. 승진한 뒤 남 대표는 오랫동안 전국 축산농가를 다니며 축산기술을 지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한우와 젖소에 대한 지도관리, 컨설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안성농장에서 수없이 많은 소를 죽이고 살리면서 배운 노하우를 축산농가에 전파했다. 남 대표는 “내가 당시엔 꽤 유명한 강사였다”고 말했다.

이후 남 대표는 미국 주재원, 축협 축산개발부장, 농업경제기획실장, 축산기획담당 상무를 지냈고, 농협유통 대표이사(사장)를 거쳐 2008년 7월 농협중앙회 축산경제 대표이사가 됐다.

▼ 수십 년간 축산 관련 업무만 해왔는데, 가장 보람 된 일은 뭔가요.

“우리나라 축산의 근대사를 직접 경험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에요. 우루과이라운드(UR) 대책팀에서 일할 때 미국육류협회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응하려고 농림부로 파견 나갔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우리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한 게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위배된다며 제소한 사건인데, 정말 힘들었죠. 1989년부터 6년간 축협 미국사무소 초대 사무소장을 맡으면서 민간 외교활동을 했던 것도 쉽지 않았지만 보람 있었어요.”

안심축산물 브랜드 작업 추진

“축산인은 생산에만 전념 농협은 글로벌 축산유통그룹 만든다”

2009년 7월 15일 서울 영등포구 홈플러스 영등포점 앞에서 DNA 및 잔류유해성 물질 검사를 거친 농협 안심한우 시식행사가 열렸다. 왼쪽부터 남성우 농협 축산경제 대표, 글렌 아트웰 홈플러스 부사장.

▼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1985년 소 값 파동 났을 때가 가장 먼저 기억나네요. 83년 돼지 파동도 그렇고. 값이 폭락해 농민들이 울면서 돼지를 땅에 묻는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찢어졌어요. 몇 년 전 발생한 구제역 파동도 잊지 못할 일이에요. 돼지만 330만 마리를 묻었잖아요.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었죠. 엄동설한에 땅을 파서 살아 있는 돼지를 묻었는데,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지금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고 속상해서. 공무원도 9명이나 과로사 등으로 죽었잖아요.”

▼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요.

“축산농가부터 잘해야죠. 그래서 농협은 축산농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만전을 기하고 있어요. 200여 대에 불과한 방역차량도 600대 이상으로 늘렸죠. 공동방역사업, 백신사업도 꾸준히 하고 있어요. 이젠 그때 같은 참사가 다신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2008년 축산경제 대표이사에 취임한 이후 남 대표는 우리나라 안심축산물을 브랜드화하는 작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2008년 11월 안심한우를 브랜드화한 것을 시작으로 안심한돈(2009년 3월), 안심계란(2009년 11월), 안심오리(2011년 5월), 안심벌꿀(2011년 6월), 안심닭(2011년 11월)을 차례로 브랜드화했다. 앞으로 한우 유통물량의 50%, 돼지 유통물량의 40% 이상을 농협이 장악하게 만드는 게 남 대표의 목표다. 그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조만간 이 목표를 이룰 것 같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농협은 현재 이런 축산물 관련 사업을 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한다. 농협이 도매시장을 장악해 유통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이것을 프랜차이즈 형태로 일반 소비자에게 전한다는 계획이다. “도매를 장악하면 소매시장은 자연스레 장악된다”고 남 대표는 강조했다. 축산물코너를 마련한 전국 하나로마트 500여 곳은 남 대표가 목표를 이루는 데 중요한 거점이 되고 있다. 농협은 현재 270여 개에 불과한 안심축산물 전문점도 앞으로 1000개 정도로 늘릴 계획을 세워놓았다. 남 대표는 “닭고기 전문점인 또래오래도 전국에 900개 정도 운영하고 있다. 다 프랜차이즈 형태다. 목우촌이 만든 웰빙마을, 바비큐마을도 마찬가지다. 협동조합 정신에 맞게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말씀해주시죠.

“목표는 전국 축산농가가 생산한 물량의 50% 이상을 농협이 책임지고 판매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거예요. 우리는 ‘글로벌 축산유통그룹’으로 조직을 키운다는 원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죠. 축산인이 다른 걱정 없이 생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도 꼭 하고 싶네요. ‘축산인 여러분, 당신들에게는 농협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주간동아 858호 (p32~34)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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