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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이형석의 영화 읽기

헐, 링컨이 흡혈귀와 싸운다고?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의 ‘링컨 : 뱀파이어 헌터’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헐, 링컨이 흡혈귀와 싸운다고?

헐, 링컨이 흡혈귀와 싸운다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흡혈귀를 때려잡는 뱀파이어 헌터였다?’

이런 가정이 미국 영화 제작자의 귀에 얼마나 솔깃했을까. 할리우드 유명 프로듀서인 짐 렘레이는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의 소설 ‘링컨 : 뱀파이어 헌터’를 보자마자 무릎을 쳤다. 2010년 출간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선풍을 일으킨 책이다. 미국 16대 대통령인 링컨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이자, 신화이고 스타다. 더욱이 현재 백악관 주인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고, 199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TV와 스크린, 서점가에서는 ‘트와일라잇’ 시리즈나 ‘렛미인’을 비롯한 뱀파이어물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굳이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단 한 줄의 콘셉트만으로 흥행을 위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듯 보였다. 렘레이는 앞서 ‘원티드’ ‘나이트 워치’ 같은 흥행작을 함께 만든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에게 이 책을 소개했다. 베크맘베토프는 카자흐스탄 출신이면서 미국 영화판 물을 좀 먹은 스타 감독이다. 그러니 그의 촉수라고 다를 리 없다. 최근 방한한 그는 “책 제목부터 구미를 당겼다”며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낮에는 책과 연설, 밤에는 도끼

그로부터 약 3년 만에 같은 제목의 영화 ‘링컨 : 뱀파이어 헌터’가 세상에 나왔다.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였다면?’이라는 한 줄의 가정문이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의미에서 ‘하이 콘셉트 영화’이며, 실존 인물의 전기적 사실과 꾸며낸 이야기를 섞었으니 ‘팩션(faction)’이고, 요즘 가장 각광받는 뱀파이어 액션 장르의 판타지 영화다.



영화에 단서를 제공한 원작자 스미스가 일단 재미있는 작가다. 그의 전작은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로,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 로맨스 ‘오만과 편견’을 좀비물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오만과 편견’ 속 다섯 자매가 좀비를 퇴치하는 여전사들이었다는 설정이다. 그의 또 다른 저서로는 포르노와 에로영화의 역사를 추적한 논픽션 ‘빅 북 오브 포르노 : 추잡한 영화 들여다보기’가 있다. 조지 W 부시가 재임한 8년 동안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전) 대통령을 대신해 발송한 사과문이라며 낸 ‘우리 대통령을 용서하시길’이라는 책도 있다. ‘스파이더맨 핸드북 : 극강의 훈련 매뉴얼’ ‘공포영화에서 살아남기 : 살인을 피하는 방법’ 등도 그가 쓴 책이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를 해방한 링컨은 가난을 극복하고 변호사를 거쳐 위대한 정치인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단련한 성실성을 타고났으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상징되는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그러나 링컨의 진짜 무기는 따로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바로 도끼다. 낮에는 책과 연설이 그의 힘이지만 밤에는 흡혈귀들의 목을 베는 도끼가 인류를 악으로부터 해방할 유일한 무기였다는 것이다.

링컨은 실제 8세쯤 친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영화는 그것이 뱀파이어 소행이라고 설정한다. 링컨(벤저민 워커 분)은 복수에 나서지만 오히려 괴한들로부터 생명을 위협받고, 위기의 순간 그를 구해준 수수께끼 인물 헨리(도미닉 쿠퍼 분)로부터 세상에 뱀파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링컨은 법률공부에 매진해 변호사가 되는 한편, 헨리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마침내 뱀파이어 헌터로 거듭난다. 그렇게 링컨의 한 손엔 ‘육법전서’가, 또 한 손엔 도끼가 들린다.

헐, 링컨이 흡혈귀와 싸운다고?
한국 영화도 ‘팩션’이 대세

영화는 마침내 미국 건국사와 남북전쟁, 노예해방사를 새로 쓴다.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 틈에 섞인 뱀파이어들이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노예를 새로운 식량으로 삼는다.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들은 남부에 거점을 마련해 영향력을 확장하며 미국을 뱀파이어 천국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다.

링컨은 노예를 더는 뱀파이어의 먹잇감으로 희생하지 않으려고 전면적인 대결에 나선다. 매일 밤 도끼 하나에 의지해 뱀파이어 사냥을 벌이는 것으로는 ‘악의 시대’를 종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정치계에 뛰어들어 마침내 대통령이 된다. 그가 노예 해방을 선언하자 남부를 장악한 뱀파이어들이 반발한다. 그리고 전쟁이 터진다. 남북전쟁은 노예제도를 두고 경제적 이해가 엇갈린 남북 백인들의 대결이 아니라, 노예를 먹이로 삼는 뱀파이어와 그들을 퇴치하려는 헌터들의 일대 전면전이었던 것이다.

국내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포함해 최근 극장가에 ‘팩션’이 잇따르는 사실이 흥미로울 법하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세자 시절의 세종, 즉 충녕대군이 책을 좋아하지만 심약하고 소심하며 이기적인 청년이었다는 상상을 담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노비와 신분이 뒤바뀌면서 고초를 겪고 이를 통해 민초 삶을 이해하면서 성군이 된다는 이야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역시 서빙고의 얼음을 훔치는 가상의 조선 도둑들 이야기에 영·정조의 몇 가지 사실(史實)을 삽입했다. 이병헌 주연의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이 정적의 공세와 위협을 피하려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대리인을 내세웠다는 발상을 담았다.

그나저나 이러한 팩션을 보면 한 가지 걱정이 생길 법도 하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베토벤은 음악가가 아니라 개의 한 품종’이며 ‘미켈란젤로는 거북 이름’이라고 여기는 어린이들이 링컨을 ‘해리 포터’ 같은 판타지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말이다.



주간동아 2012.09.03 853호 (p56~57)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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