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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어쨌든 우린 야시장으로 간다

어쨌든 우린 야시장으로 간다

어쨌든 우린 야시장으로 간다
밤 시장

텅 빈 시장을 밝히는 불빛들 속에서

한 여자가 물건을 사 들고 집으로 간다.

집에 불빛이 켜 있지 않다면

삶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밤 시장,

얼마나 뜨거운 단어인가!

빈 의자들은 불빛을 받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빈 의자들은 깜빡거리며 꿈을 꾼다.

밤 시장을 걷다 보면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가장 쓸쓸한, 뜨거운 빈 의자들과 만난다.

텅 빈 상점 안을 혼자 밝히고 있는

백열전구 속 필라멘트처럼

집을 향해 오는 이를 위해

불꽃이고 싶다.

삭힐 수만 있다면 인생의 식탁을

풀처럼 연한

그런 불꽃으로 차려야 한다.

―박형준 ‘밤 시장’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어쨌든 우린 야시장으로 간다

야시장이 열렸대. 정말? 날이 더워서 잠도 잘 안 오는데, 거기나 구경 가자. 어느 날, 사촌 누나가 달콤한 유혹을 해왔다. 누나,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 그런데도 시장에 들어갈 수 있어? 머리를 긁적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장이 무슨 술집이니? 혹시 야시장이 야한 시장의 준말인 줄 아는 거 아냐? 누나가 퍼붓는 지청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참 뒤에야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시장이 밤에 열려? 엄마들은 보통 아침이나 낮에 가잖아. 나보다 두 살 위인 누나는 당황했다. 거기엔 평소에 못 먹는 맛있는 것도 많아. 두 팔로 껴안기 힘들 만큼 커다란 인형을 뽑을 수도 있고. 어쨌든 우리는 야시장에 가야 해.

누나의 횡설수설에 결국 나는 돼지저금통을 뜯었다. 은빛 동전들이 신문지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그것들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야시장으로 갔다. “밤은 깊어가는데” 우리는 아랑곳 않고 야시장으로 갔다. 누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야시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던 것이다. 노점에는 온갖 신기한 것이 가득했다. 고소한 기름내가 일대를 진동하고 설탕이 녹는 광경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빈 의자들은 불빛을 받으며” 호주머니가 열리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이미 내 호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가슴도 덩달아 텅 비었다.

우리 동대문 가자, 밤 시장 구경하러. 밤 시장? 야시장 말하는 거지? 서울에서는 그걸 밤 시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네. 아니, 밤 시장은 밤에 서는 장을 가리키는 거야. 밤이라 확실히 운치도 더 있고.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유혹을 해왔다. 야시장만큼은 아니지만 눈과 입이 호강할 것임엔 틀림없어. 그 말을 듣고 나니 어느새 나는 밤 시장에 와 있었다. “밤 시장을 걷다 보”니 불빛이 예뻤다. 신기하게도, 불빛들은 하나하나 다 달랐다. 색깔부터 밝기까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채소 더미 위의 불빛은 “풀처럼 연한” 색이었다. 생선 위의 불은 푸르스름하게 빛났고 전을 파는 노점의 불은 노르스름했다. 불빛에서 예의 그 고소한 기름내가 나는 듯도 했다.

거기에 “가장 쓸쓸한, 뜨거운 빈 의자들”이 있었다. 그 의자들 중 하나에 가만히 엉덩이를 포갠다. 따뜻하다. 필시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 여기에 앉아 김치전이나 감자전을 먹었을 것이다. 천천히 먹다가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라 허겁지겁 남은 음식을 해치웠을 것이다. 밤 시장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다른 누군가의 꽃 같은, “불꽃” 같은 마음이 생생하다. “집에 불빛이 켜 있지 않다면” 집에 올 누군가는 분명 적적할 테니.

집에서 기다리는 누군가는 불을 끄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뜨거운 단어” 위에 손등을 포개기 위해 집에 가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더 빨라진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절실한 누군가다. 누군가를 항상 그리워하는 누군가다. 발걸음이 절박해진다.



주간동아 2012.08.20 851호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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