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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불에 덴 듯 강렬했던 그녀의 입술

불에 덴 듯 강렬했던 그녀의 입술

불에 덴 듯 강렬했던 그녀의 입술
수많은 실금이 없었다면

-입술 2

담벼락에 난 범퍼 자국처럼

그것은 쪼글쪼글했습니다

하지만 담은 문이 아니어서



저 무시무시한 내면은 지금 고요합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아선 막무가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것에 주름을 새겼습니다

수많은 실금이 없었다면 그것은

집도 차도 차 안의 그도 삼켜버렸을 겁니다

물론 서툰 그도 조마조마하게

그곳을 지나쳐 갔을 테지요

―권혁웅 ‘수많은 실금이 없었다면’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 2007 중에서)


불에 덴 듯 강렬했던 그녀의 입술

너는 입을 벌린다. “막무가내”로. 처음에 네가 입을 벌린 이유는 순전히 먹기 위해서였다. 젖을 먹기 위해. 아주 나중에 그 기억을 살려 젖 먹던 힘을 발휘하기 위해. 너는 입을 벌려 “쪼글쪼글”한 입술로 더 쪼글쪼글한 엄마 젖꼭지를 꽉 물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듯, 때때로 악을 쓰기도 하면서. 엄마는 순순히 네게 젖을 내주었다. 그것만이 사랑하는 길이라는 듯. 네가 젖꼭지를 너무 힘껏 물거나 빨면, 엄마의 미간은 찌푸려지고 입 밖으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너는 집이 떠나갈 정도로 요란하게 울어댔다.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린 채로. 엄마는 젖먹이를 어르며 네 놀라운 목청에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너는 쑥쑥 자라났다. 나이를 더 먹으면서, 입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늘어났다. 네가 입을 벌려 처음으로 아빠와 엄마를 불렀을 때 아빠는 엄마를 보고 환히 웃었다. 엄마는 아빠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을 훔쳤다. 네가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어떤 단어를 난생처음 발음할 때면 엄마와 아빠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고요”함을 뚫고 네가 돌고래처럼 솟구쳐 오르는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서. 네 몸에 어떤 사물의 형상이 새겨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어서. 그날, 네 입술에는 처음으로 “실금”이 하나 그어졌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아”야 했지만, 간혹 네 입은 참지 못하고 고약한 말을 내보내기도 했다. 너와 얘기를 나누다가 친구는 울면서 집에 갔다. 가시 돋친 너의 말에 삼촌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어린애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한번 벌린 입은 쉬 다물어지지 않았다. 너는 속사포처럼 무슨 말들을 자꾸자꾸 쏟아냈다. “무시무시한 내면”은 말의 외피를 쓰고 먹구름처럼 퍼져나갔다. 네 입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잡으려고 했지만, 말은 얄궂게도 네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순식간에 소문이 되고 사실로 둔갑할 때도 종종 있었다. 어느 날, 너는 네가 철석같이 믿었던 누군가에게 무지막지한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너는 네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껏 네가 그런 말들을 해왔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 그사이, 입술에 실금이 하나 더 그어졌다.

사춘기가 찾아왔다. 어릴 때와 달리, 너는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네 입술은 “담”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그 담을 섣불리 넘어오려는 사람은 없었다. 담벼락에 낙서를 하거나 노크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너는 너처럼 말수가 없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비밀이 생기자 또다시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너처럼 그녀도 서툴렀다. 서툴러서 수줍었다. 너는 스스로 담을 허물었다. 그녀가 담 앞에 서 있었다. 너와 그녀는 어떤 강렬한 힘에 이끌려 동시에 입을 벌렸다. 그녀의 입술이 “조마조마하게 그곳을 지나쳐 갔”다. 너의 입술에 난 실금에 그녀의 실금이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담벼락에 난 범퍼 자국”처럼 충격은 강렬했고, 흔적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네가 이따금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도 그때의 설렘을 더듬고 싶어서이리라.



주간동아 2012.08.13 850호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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