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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여자의 몸통을 큰 칼로 휙!

여자의 몸통을 큰 칼로 휙!

여자의 몸통을 큰 칼로 휙!
마술사

구레나룻을 기른 마술사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합니다

박수 소리는 사자처럼 우렁찹니다

미소를 띤 마술사는



번쩍이는 큰 칼로 여자의 몸통을 자릅니다

비명도 없이

슬픔도 없이

까딱 까딱 까딱

손과 발을 흔들며 여자는 웃고 있습니다

위대한 마술사는 미소를 띠고

콧수염을 쓰다듬습니다

펑!

검은 상자 속에서

여자는 비둘기가 되거나

빨간 꽃이 되거나

영영 사라지고 없거나

어느 국경일이었고

텔레비전 앞에 한 꼬마가

피 묻은 비둘기처럼

울어버렸습니다.

― 이미자 ‘검은 뿔’(천년의시작, 2007)에서

여자의 몸통을 큰 칼로 휙!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올해도 작년이나 재작년처럼 선물을 받지 못했다. 내가 나쁜 아이였나. 엄마 말을 잘 듣지 않았나. 나는 할 말이 없어진다. 울상이 된다. 그래도 너무한 것이다. 밖에 나가서 놀기도 싫다. 장난감 로봇이나 동화책을 선물 받은 친구들이 자랑을 해댈 게 빤하기 때문이다. 리모컨을 쥔 내 손이 부르르 떨린다.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돈다. 괜히 “까딱 까딱 까딱” 리모컨을 위아래로 흔든다.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마구 누른다. 브라운관이 쉬지 않고 ‘깜빡 깜빡 깜빡’ 윙크한다.

TV에서는 이미 작년과 재작년에 본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또 방송한다. 그사이 나는 두 살이나 더 먹었는데, 케빈은 그때랑 똑같다. 내게는 왜 케빈에게처럼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걸까. 케빈이 집 안 이곳저곳에 방해물을 설치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다. ‘나 홀로 집에’ 있는 것이 더는 흥미롭지 않다. 엄밀히 말해 이는 지루하고 쓸쓸한 일이다. 애먼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다 버튼을 꾹꾹 누른다. 다음 채널로 순간 이동한다.

옆 채널에서는 마술쇼가 한창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진다. 사람 몸을 절단하는 마술은 초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잔인하다. “미소를 띤 마술사”가 “번쩍이는 큰 칼로 여자의 몸통을 자”르려고 한다. 여유가 넘친다. 그는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자신의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는다. 여자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 눈치다. 심지어 살짝 ‘웃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게 더 놀랍다. 어쩜 저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을까! 손바닥으로 두 눈을 확 가린다. 동시에 손가락 사이를 슬쩍 열어 곁눈질로 TV를 지켜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자의 몸통을 큰 칼로 휙!
잠시 후, 마술사가 “검은 상자”를 다시 연다. 예상대로라면 상자 안에는 토막난 여자 몸이 있어야 한다. 손발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누가 어깨라도 툭 친다면 나는 필시 까무러칠 것이다. “펑!” 사방에 소리가 진동한다. 눈을 가리던 손으로 재빨리 귀를 막는다. 잠시 후, 상자가 활짝 열린다. 상자 속에 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파드닥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여자는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올해도 받지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그때 천장에서 여자가 환히 웃으며 줄을 타고 내려온다. 그가 미인대회 우승자처럼 손을 흔들자 “박수 소리”가 홀을 가득 메운다. “텔레비전 앞에 한 꼬마”가 한 살을 더 먹는 데 그날만큼 적당한 날은 없었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837호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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