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6

2012.05.07

5월,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연극 ‘푸르른 날에’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2-05-07 10:1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5월,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2010년 5월 18일 광주를 찾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전 내내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거센 빗물에 구(舊) 묘역의 무덤을 덮은 흙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깔끔한 대리석 옷을 입은 신(新) 묘역에서 열린 공식 행사를 뒤로하고, 유가족들은 그 들목에 서서 목이 터져라 ‘임을 위한 행진곡’만을 불렀다. 열 번, 스무 번 노래는 반복됐다. 우산을 받치고 덤덤하게 전남도청에서의 마지막 밤을 회상하던 초로의 남성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그날 새파란 아들을 보낸 어머니는 지금 살았다면 아들이 몇 살이었을까 부질없이 셌다. 이들은 여전히 30년 전 5월에 살고 있었다.

    연극 ‘푸르른 날에’는 역사에 젊음을 빼앗긴 채 살아남은 사람들의 ‘오늘’을 이야기한다. 50대의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된 정혜와 스님이 된 민호. 지금이야 똥배도 나오고 트림도 ‘꺼억’ 소리 내어 하지만, 한때는 열렬히 사랑한 사이다. 1980년 봄, 민호는 도청사수대에 들어간 정혜의 동생을 구하려고 포위된 도청에 들어간다. 죽어가는 시민군을 뒤로하고 목숨을 구걸한 민호는 고문 후유증 탓에 정신이상을 겪다 결국 임신한 정혜를 남겨둔 채 불가에 귀의한다. 그렇게 ‘소리 없는 비명’ 같은 30년이 지난다.

    서서히 잊히는 역사의 비극은 개인 삶에 크나큰 상흔을 남겼다. 실제 수많은 사람이 그 시대를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됐고, 남성과 여성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기쁨을 포기했다. 여산 스님이 된 민호는 계속해서 과거를 부정한다. 그는 무대 가운데 자리한 기다란 다탁(茶卓)만큼 세상과 거리를 두고 도망친다.

    하지만 결국 번뇌를 벗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명랑하고 바르게 자란 딸을 보며 허허 웃어버리는 것, 그리고 정혜에게 잘 우린 차 한 잔 권하는 것뿐임을 인정한다. “푸르른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노랫말처럼, 미치도록 아플 땐 아파해야 하는 것이다. 뻐꾹새처럼 제 자식을 다른 둥지에 맡기고 도망쳤던 민호는 30년 만에 돌아와 신부가 된 딸의 손을 잡는다. 그 화해의 순간, 뻐꾹뻐꾹 울음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5월,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이 작품이 지극히 통속적인 줄거리와 무거운 소재를 끝까지 긴장감 있고 흥미롭게 펼치는 비결은 희극적으로 과장한 대본에 있다. 연극적 요소를 최대한 살린 발성과 아이러니, 위트가 섞인 대사는 낯설지만 몰입하게 한다. 제3회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극본답게 구성이 탄탄하고 상징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바닥이 뚫린 기다란 다탁은 관(棺) 같기도, 성(城) 같기도 해 음침하고 고립된 느낌을 주지만 결국 산 자와 죽은 자, 민호와 정혜가 화해하는 공간이 된다. 젊은 민호 역의 배우 이명행은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신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5월 20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 문의 02-577-1987.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