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6

2012.05.07

고령자 구매난민 발생 남의 일 아니다

골목 상권 붕괴

  • 김동엽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 dy.kim@miraeasset.com

    입력2012-05-07 09: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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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자 구매난민 발생 남의 일 아니다
    “동네슈퍼는 다 어디 갔어?”

    요즘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이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골목 안 동네슈퍼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최근 용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대형 유통업체들이 골목 상권으로 눈을 돌리면서 이런 현상이 가속화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동네슈퍼라고 볼 수 있는 4인 이하 종합소매업 점포 수는 2003년 11만5000개에서 2009년 9만7500개로 6년 새 15%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 기업형슈퍼마켓은 234개에서 673개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이 같은 상황이 이어지면 골목 상권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하다(표 참조).

    정부가 나서서 ‘유통시장발전법’을 개정하고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의 휴일 휴업을 의무화하는 등 골목 상권 보호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 개입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이 소비자에게 질 좋고 다양한 상품을 싼 가격에 제공하는데, 의무 휴업을 강행할 경우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면 설득력 있는 얘기다. 하지만 골목 상권 보호를 영세상인 문제로만 보지 않고 고령사회에 대비한 인프라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골목 상권 몰락의 피해가 고스란히 노인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대국 일본에서는 ‘구매난민(購買難民)’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구매난민이란 생선, 채소 같은 음식재료와 생필품을 제때 구하지 못해 곤란을 겪는 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 일본의 노인은 고도성장기를 이끌며 부를 축적한 덕에 청장년층에 비해 월등하게 나은 경제력을 자랑한다. 그런데도 구매난민이 된 이유는 우후죽순 생겨나는 대형마트에 밀려 동네슈퍼가 사라지면서 집 근처에서 생필품을 구입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령자 구매난민 발생 남의 일 아니다

    4월 22일 전국적으로 대형마트 의무휴업이 처음 시행됐다.

    두부 한 모 사려고 자전거로 20~30분



    일본 어디에서나 구매난민을 만날 수 있지만, 대도시 인근 신도시에 특히 많다. 도쿄도 북쪽 이타마현의 고마무사시다이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신도시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전체 주민 6000명 중 65세 이상 고령자가 25%를 차지한다. 고령화에 따른 소비 둔화와 경기침체 여파로 2008년 4월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유일한 동네슈퍼가 문을 닫았다. 이제 이 지역 주민은 두부 한 모를 사려고 자전거로 20~30분을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후쿠오카현 이즈미가오카 하이타운도 사정이 비슷하다. 전체 1500가구 중 300가구가 고령자인 이곳은 이미 5년 전에 단지를 지나는 노선버스를 폐지했으며, 하나밖에 없는 슈퍼마켓마저도 최근 폐점 위기에 놓였다. 이 슈퍼마켓이 문을 닫으면, 이곳 노인들은 생필품을 사려고 2km 이상 떨어진 대형마트까지 4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나이 들면 운전도 쉽지 않기 때문에 고령자 중에는 장을 보려고 택시를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두부 한 모와 콩나물 한 봉지를 사려고 기본요금(710엔)과 호출 비용(300엔)을 내야 하니 배보다 배꼽이 큰 형국이다.

    동네슈퍼를 대신해 곳곳에 들어선 편의점은 구매난민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다. 하지만 가공품을 주로 판매하는 터라 출근길 샐러리맨에게는 어울릴지 몰라도, 채소와 생선 같은 신선한 찬거리를 원하는 고령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식품이 노인 건강을 위협한다는 지적도 있다. 1970∼80년대 미국과 영국 등에서도 교외지역에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서면서 채소와 생선 등을 파는 골목 상점이 무더기로 도산했다. 당시 자동차를 이용할 수 없는 노인과 빈곤층의 식생활이 인스턴트 위주로 바뀌면서 심장병 발생이 늘어났다는 보고가 있다.

    고령자 구매난민 발생 남의 일 아니다
    인터넷 주문과 이동장터 활성화 유도

    고령사회에서 구매난민 문제는 일정한 흐름을 거치면서 확대 재생산된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처음에는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경영 압박에 시달리던 골목 상권이 무너지면서 구매난민이 발생한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 대형마트 간 경쟁이 더 심해지고, 그로 인해 채산성이 떨어지면 아무리 대형마트라도 버티기 힘들다. 일본에 진출했다 경영 부진으로 철수한 서구의 대형마트가 좋은 사례다. 대형마트가 철수하면 구매난민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구매난민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본은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인터넷 주문 서비스다. 인터넷을 활용하면 고령자가 굳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고령자가 대부분 인터넷 환경에 익숙지 않다는 것. 이를 해결하려고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는 터치패드 방식의 주문 기계가 나왔다. 이 기계를 고령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에 설치한 뒤 생필품을 주문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터넷 주문 서비스에는 일본 최대 운수회사인 야마토운수(주)와 지방 슈퍼마켓이 연대해 참여하고 있다. 고령자가 기계를 이용해 주문을 넣으면 야마토운수가 지방 슈퍼마켓에서 물품을 받아 고령자에게 당일 배송하는 방식이다. 편의점과 신문배급소가 제휴한 경우도 있다. 편의점의 생필품과 신문배급소의 배달망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가 일정 기간 도시락 배달을 신청하면, 신문배급소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가져다 고령자에게 배달하는 방식이다.

    이동 판매를 활용하는 것도 구매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가 주도해 이동장터를 여는 곳이 증가하고 있다. 특정 요일에 마을 인근 광장을 식재료 판매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5일장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에서도 접목해볼 만하다. 이미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특정 요일마다 장이 서는 곳이 있는데, 고령사회의 구매난민 해소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고령자 구매난민 발생 남의 일 아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일본이 겪는 구매난민 문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 확산에 따른 골목 상권의 붕괴는 단순히 영세상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령자의 생존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으로 일반인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은퇴교육과 퇴직연금 투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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